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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의 힘? … CD 대신 연주회장 문화 뜰까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왼쪽)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두 사람 모두 음반 시대의 최고 스타였다. [중앙포토]
유튜브 이전에도 음반 업계에는 위기가 찾아왔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광범위하게 활동한 ‘부트레거(bootlegger)’들이 그 주인공이다. 부트레거란 음악회장에 몰래 녹음기를 들고 들어가 음악회를 녹음해 가는 사람들을 일컬었다. 스스로 녹음한 일명 ‘해적반’들을 시중에 마구잡이로 유통시키는 이들 탓에 불과 몇 주 전 같은 아티스트의 정규 앨범을 공식적으로 발매한 음반사들은 골머리를 앓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실황 연주가 저질의 녹음 상태로 음반으로 나와버린 아티스트들은 발가벗겨진 심정이었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음반의 종말<하>

그런데 팝계에서는 이런 상황을 완전한 역발상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인 미국의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는 자신들의 쇼를 불법으로 녹음해가는 관객들을 위해 도리어 ‘테이퍼스(tapers) 티켓’을 발부했다. 장비를 제대로 갖춰 오는 관객들은 아예 사운드보드에 직접 마이크를 꽂아 쇼를 통째로 녹음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티스트는 자신들의 로열티를 사수하는 대신 매 공연이 실황 음반으로, 그것도 아티스트 스스로가 보장하는 최고의 음질로 출시되는 호사를 누렸고, 쇼를 녹음 및 녹화해가는 관객들은 서로서로 테이프를 사고팔며 공연의 프로모션을 자청했다. 그들이 30여 년간 연 2350여 회 콘서트 중 약 2200회가 녹음 및 녹화된 것으로 알려졌고, 현재 온라인으로까지 발을 뻗은 음원시장에서 그들의 부가가치는 밴드 해체 20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최고다. 자신의 음악을 직접 유튜브에 올려 관객을 모으는 현 시대 음악가들의 첫 선배 격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일련의 흐름이 보여주는 게 단순히 저작권에 대한 격세지감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이 흐름이 가장 많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보다 관객이 느끼는 음반과 실황의 괴리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글렌 굴드가 1955년에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은 200만 장 가까이 팔렸다.
CD와 실제 연주의 괴리는 점점 더 커져왔다. 처음에는 단지 음악회의 실황을 그대로 녹음하거나 그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연주를 녹음하는 것이 음반이었다. 그러니 그 감흥이 연주회와 완전히 다르지는 않았다. ‘베노 모이셰이비치 인 리사이틀’ 음반에 들어 있는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에서 그는 시작부터 오른손 패시지를 완전히 다 날려버린다. 반복 이후 다시 돌아와서도 또 다 날려버린다. 실수에 무감각한 내가 들어도 이건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다. 대신 그의 다른 음반에 들어 있는 리스트의 연습곡 ‘경쾌’는 마약이 주는 환각이 이런 걸까 싶은, 황홀경의 절정이다. 음반만으로도 한 음악가의 궤적을 대강 바라볼 수 있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레코딩이 차츰 독자적인 예술로 발전하면서 카라얀이나 굴드 같은 레코딩에 능한 아티스트들도 생겨났다. 여담이지만 이 둘이 피아노 협주곡을 각각 오케스트라 파트와 피아노 파트를 따로 녹음해 붙이는 작업까지 시도했음도 최근에 알려졌다. 그렇다 해도 카라얀이나 굴드가 스스로의 기술 전반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했다면, 과도히 발달한 현대의 녹음 기술은 기계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연주자들의 연주까지도 모두 완벽한 결과물로 만들어버린다. 16분음표 한 음까지 잘라 붙일 수 있는 요즘 음반에서 실수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원하는 만큼의 에코에, 마스터링 작업에서는 소리의 분위기까지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으니 그 연주자 특유의 소리가 원래는 어떤 빛깔인 건지도 알 수가 없다.

물론 음반과 실황은 다르다. 아니, 같을 필요가 전혀 없다. 나는 심지어 같은 곡도 레코딩할 때와 무대에서 연주할 때 각각의 해석을 전혀 다르게 한다. 아마 많은 연주자가 그럴 것이다. 연주회장에 온 것처럼 한자리에 앉아 불까지 끄고 처음부터 끝까지 초집중하며 음반만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듣다 보면 책도 볼 수 있고, 식사도 할 수 있고, 옆 사람과 대화도 나눌 수 있다. 또 CD는 몇 번이고 돌려 들을 수가 있다. 정말 좋은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만 몇 번이고 재청취하는 것도 가능하고, 반대로 그저 그런 트랙은 다시는 안 들으면 그만이다. 연주자로서는 디테일에 훨씬 더 집착해도 되는 것이다. 실황 연주는 물론 정반대다. 모든 걸 다 잃어도 잃으면 안 되는 한 가지가 바로 전체적인 흐름이다. 청중의 집중력을 놓칠 확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너무 느리거나 빠른 템포도 자연히 배제하게 된다. “똑같은 부분이 두 번 이상 나오면 무조건 앞과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쇼팽의 말 역시 조금은 무시해도 괜찮다. 앞은 어떻게 연주했었는지 돌려서 다시 확인할 기회를 애초에 제공하지 않으니.

문제는 음반과 실황 연주가 이렇게 완전히 다른 것이야 아티스트 사정이고 관객들은 그것에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음악회장에 가는 관객들은 같은 곡이 녹음된 음반과 음악회장의 연주를 비교한다. 실황 연주가 음반만큼 실수 없이 매끄러울 리 없고, 음반이 실황 연주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할 리 없다. 결국 실황 연주는 음반에 지고, 음반은 실황 연주에 지는 셈이다. 몇 달 전 만난 한 지인은 “CD는 점점 연주자 스스로의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매체로 전락하고 바야흐로 유튜브를 등에 업은 18세기식 연주회장 문화가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하긴 알프레드 코르토처럼 그 특유의 불안정함으로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할 음반은 더 이상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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