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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물 걱정 없앤 페달식 펌프, 25달러에 보급

지난해 5월 ‘제3회 적정기술 사회적 기업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폴 폴락. [사진 SK행복나눔재단]
몇 년 전 유튜브에서 인상 깊은 동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필리핀의 한 빈민가, 철길 옆 좁은 부지에 누추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창문 하나 없는 집안은 암흑세상이다. 코앞도 안 뵈는 어둠을 피해 사람들은 해가 질 때까지 바깥을 떠돈다. 밥도 길에서 먹고, 빨래도 길에서 한다. 그런 동네에 ‘태양의 데미’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그는 빈 페트병에 정제수와 약간의 표백제를 채워 넣어 일종의 태양광 전구를 만든다. 집마다 지붕에 구멍을 뚫고 이 페트병의 상단은 실외, 하단은 실내에 속하도록 고정한다. 페트병 상단을 비춘 햇빛은 혼합액을 투과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증폭돼 병 하단이 속한 실내를 환하게 비춘다. 동영상 속 주민들은 말한다. “페트병이 우리 집을 밝히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이제 이거 없이는 못 살아요.”

세상 바꾸는 체인지 메이커 <21> 적정기술 비정부기구 iDE 설립자 폴 폴락

데미에게 마법 같은 기술을 전수해준 것은 ‘나의 피난처(My Shelter)’라는 이름의 비영리재단이다. 재단은 브라질 기술자 알프레드 모저가 2002년 개발한 이 초간단 페트병 전구를 전 세계에 보급하는 일을 한다. 이름 하여 ‘리터 오브 라이트(The Liter of Light)’ 운동. 대표적인 적정기술 프로젝트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특정 지역의 경제·문화·환경 조건을 고려해 그곳에서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고안된 기술을 말한다. 환경오염, 질병 유발 같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도 중점을 둔다. 필터가 내장돼 있어 오염된 물을 바로 빨아 마실 수 있는 ‘라이프 스트로’, 아궁이에 불을 때는 대신 태양열로 요리를 할 수 있는 ‘셰플러 조리기’ 같은 것들이 있다.

11개국 2000만 명 빈곤 악순환에서 구해
1960년대 이 개념을 처음 내놓은 이는 독일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다. 하지만 적정기술을 진정 세상을 바꾸는 큰 흐름으로 발전시킨 이는 국제개발기업(iDE·International Development Enterprises) 설립자이자 베스트셀러 『빈곤으로부터의 탈출(Out of Poverty)』 저자인 폴 폴락(Paul Polak·79)이다.

폴락은 말한다. “전 세계 디자이너와 기술자의 90%는 상위 10%의 부유한 고객을 위해 일한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혁명, 기술 혁명이 필요하다”고. 그는 빈곤층을 자선 대상이 아닌 고객으로 봐야 하며, 시장 개발과 마케팅에 능한 기업가가 그 흐름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도주의적 관점에 치우쳐 있던 적정기술에 시장주의와 기업가정신의 가치를 더한 것이다. 이런 접근을 통해 폴락은 세계 11개국에 적정기술을 보급했고 2000여만 명을 빈곤의 악순환에서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 1982년 1인기업으로 시작한 iDE는 현재 직원 500여 명, 연 예산 2000만 달러의 글로벌 비정부기구가 됐다.

40대 후반 적정기술의 세계로 뛰어들기 전까지 그는 정신과 의사였다. 체코에서 태어나 캐나다·미국에서 공부한 그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실력 있고 봉사정신이 투철한 의사로 이름을 날렸다. 사업에도 재능을 발휘해 부동산업으로 돈을 벌었다. 폴락은 중증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공동체 기반 클리닉을 운영했는데, 그 과정에서 빈곤층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상담보다 경제문제 해결이 먼저라는 점을 깨달았다. 아울러 방글라데시 여행을 통해 하루 1달러 이하로 사는 세계 8억 명의 삶에 눈떴다. 그는 현장에 발 딛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귀 기울이며, 실천 가능한 방안을 고심해야 해법을 낼 수 있다고 봤다. 82년 iDE 설립 이후 전 세계를 돌며 3000세대가 넘는 빈곤층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이유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8억 명의 최빈곤층 대다수가 생계를 소규모 농지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폴락은 각국 정부는 물론 민간단체들도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다고 봤다. ‘기부’‘대기업’ ‘지속적 경제성장’이 빈곤을 퇴치해 주리라는 잘못된 믿음이다. 폴락은 이를 ‘3대 허구’라 규정한 뒤 근본적 해결을 원한다면 빈곤층의 소득 자체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정기술과 비즈니스의 접목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빈곤층을 고객의 위치에 올려놓고 적정기술을 통해 그들의 필요(need)를 충족시킬 방법을 고심했다. 답은 역시 현장에 있었다.

www.paulpolak.com
삼성·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에 동참 호소
세계 각지 빈농들의 공통점은 농지로 물을 끌어올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강우에만 의존하다 보니 생산성이 떨어지고 건기에는 아예 농사를 짓지 못한다. 폴락은 이를 해결하려고 발로 페달을 밟아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족동식 펌프(treadle pumpㆍ작은 사진)를 개발했다. 펌프 제작비는 8달러, 우물을 파고 파이프를 연결하는 비용까지 포함하면 대략 25달러가 들었다. 그는 이를 기부하지 않고 농민들이 직접 사도록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공짜보다 제 돈 들여 산 물건에 더 큰 애착을 갖는다. 열심히 관리하고 최대한 활용한다. 이런 자발적 동기는 생산성 향상과 직결된다. 실제로 이 펌프를 구매한 농가는 연간 소득이 100달러 이상씩 늘어났다. 아울러 펌프를 생산·판매·유통하는 과정에서 새 일자리가 생겨났다. 우물을 파고 파이프를 연결하는 사람들도 돈을 벌었다.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 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심지어 iDE까지도 이윤을 남겼다.

폴락은 적정기술을 이용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게 대기업에도 좋은 일임을 역설한다. 세계 인구 90%의 새 시장을 키우고 다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삼성·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90%를 위한 기술·디자인 개발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수십억 고객이 ‘2달러짜리 안경, 10달러짜리 태양전지 손전등, 100달러짜리 집’을 고대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성공 비결은 싱거우리만치 단순하다. 지난해 5월 방한했을 때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적정기술을 현지에 도입하기 전 그 지역의 전형적인 가정을 골라 7시간 인터뷰하고, 또 다른 일곱 가족을 찾아 한두 시간씩 돌아가며 대화를 나눈다. 보통 닷새 정도 걸리는데 이렇게 해서 실패한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적기업 역시 결국 정답은 고객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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