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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존경하지 말자

한 아담한 출판사의 젊은 사장과 일요일 단 둘이 낮술을 마시며 길고 긴 한담을 나누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빛나는 학벌이 무조건 허울만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성과 감성이 공히 뛰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신념 같은 기운이 늘 충천하면서도 결코 주변을 피곤케 하는 법이 없는 멋진 사나이기도 하다. 저런 친구가 왜 요즘 같은 세상에서 더 잘나가는 여러 일들을 놔두고 하필 책이라는 갑갑한 물건을 만들어 팔며 쪼들려 살고 있을까라는 천박한 생각을 사실 나는 문득문득 몰래 품고 있었다. 아무리 세심히 듣고 들여다봐도 학창 시절 문학병을 앓았다거나 하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이 말은 머리가 좋고 영혼과 인격이 세련되면서 아담한 출판사를 경영하는 이들은 전부 사서 고생하며 꿀꿀하게 산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아는 그가 자신의 어떤 신념을 책이라는 별로 인기 없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 데 실현하고 있고, 그것이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에게 경제적 풍요는 물론이요 일말의 명예라도 안겨주기는 영 글러먹어 보인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는 사업가로서는 애초에 쪼다 내지 반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뭔가 길을 잘못 들어선 자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그의 미소 속에 내비칠 때 아마도 나는 그가 남 같지 않아서 편하게 여겨졌는가 보다. “베스트셀러가 책 읽는 사람들을 점점 더 줄어들게 하고 있어요. 상업주의가 상업주의로 보인다면 겁낼 게 없죠. 그런데 상업주의가 고상하게 포장되고 있잖아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성공적으로, 뻔뻔하게. 공포예요, 공포. 걱정스러워요, 정말.”

그날 나는 그의 이러한 수줍은 독설 같은 현실 진단에 항상 그러했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틀린 말도 때로는 그냥 듣고 있어주는 게 친구라면, 옳지만 슬픈 얘기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것도 친구니까.

과거에 비해 디지털과 대중문화의 시대는 매트릭스가 구축되기에 훨씬 용이한 세계다. 이제 파시스트들은 정치에서 버젓이 나오지 않는다. 문화에서 양악수술을 하고 나온다. 지적 사기꾼들이 설계자로 암약해 주물럭거리기가 제일 즐거운 데가 문화판이고, 그중 가장 누워서 떡 먹기인 곳이 문학이니 출판이니 하는 이른바 ‘박물관 예술’인 것이다. 이를 기본으로 검은 매트릭스, 악마의 시스템은 더 밖으로, 더 멀리 제 영역을 계속 넓혀 나간다.

문화 사기꾼들이 예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상황이 끔찍한 것은 가짜들을 비웃어줄 수 있는 소수의 정신들마저도 아예 씨를 말려버리는 저들의 대단한 집중력과 욕망이고, 심지어 저들이 그러한 작업에 노예 지식인들과 애완견 예술가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동원시킨다는 점이다.

세상 어느 동네나 그렇듯 문화계도 전문 정보를 가지고 직접 들어가 살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추악한 정체들이 참 많다. 사장과 편집인이 체계적으로 작가에게 이거 써라, 저거 써라 제시하고 조종하다가 그 와중에 컵이 엎어져 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처럼 표절 사건이 터진다. 진지한 작가 정신은 사라지고 얄팍한 기획만이 횡행한다. 외국 번역소설을 가져다 놓고 베낀 유명 작가는 TV에 나와 온 세상을 속이며 문학의 진정성을 설교한다. 그런 야만을 알면서도 숨겨주는 편집위원들과 그 동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당연히 모른 척한다.

그러나 결국 이런 문화 범죄도 언제든 누군가 명백히 제대로 기록하면 세세토록 그 판결문이 남는 법이다. 그 일에 두 사람은 필요치 않다. 모든 사람이 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의 위대성은 청년들에게까지 해독을 퍼뜨리면서도 자신들을 존경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상업주의와 묘하고 치밀하게 연계돼 오리무중에 의해 방치되고 탐욕과 위선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연예인병에 걸린 문화 인사들의 개똥철학 가르침은 문화 사기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마케팅이다. 이 문화전체주의적 상황에 대항할 수 있는 문화무정부주의적 존재들이 절실한 시점이다. 조직 같은 것은 필요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비웃음이 모아져 그 거대한 매트릭스의 벽에 구멍을 내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균열은 기어코 붕괴를 이끌어낼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가짜들을 알아보고 비웃어주는 능력과 용기를 잃어버린 것일까? 친구가 절망하는 것을 보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유쾌하게 살 권리가 있다. 그것이 내 친구의 ‘어떤 신념’을 응원하는 길이다. 비웃자. 아무나 존경하지 말자.



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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