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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김상옥 의사의 대한민국 건국정신



며칠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김상옥 의사 순국 9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김상옥 의사야 말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두드러진 특징인 비(非)노블레스의 오블리주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원래 국가위기를 맞으면 특권층이 솔선수범하는 법이다. 그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한다. 김상옥 의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그는 특권층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대장간에서 중노동을 했다. 22세 되던 1912년에 마침내 동대문 밖에 영덕철물점을 열었다. 그는 5년 만에 50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사장이 됐고 말총모자를 창안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사업을 확장해 갔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공적인 청년 벤처사업가였다. 만약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평생 많은 재산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1919년 3·1운동 참여는 그의 인생길을 결정적으로 뒤바꿔놓았다. 그는 한민족의 독립정신과 청년학생들의 용기와 열정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사업을 동생에게 맡기고 전업 독립운동가가 됐다. 3·1운동이 젊은이들에게 미친 엄청난 영향이기도 했다. 김상옥 의사는 청년학생들과 혁신단을 조직하고, 3·1운동을 지방과 민중 속으로 확산하기 위해 등사판으로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제작, 배포했다. 이 신문발간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7개월 동안 지속했다.



이것이 발각돼 김상옥 의사는 40일 동안 구금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다. 끝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그는 암살단을 조직해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하는 때를 타서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출영 나올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들을 일거에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전날 예비 검속으로 실패로 돌아가 김상옥 의사는 상해로 피신했다. 그는 다시 조선총독부 수뇌부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계획을 갖고 국내로 잠입해 종로 경찰서 폭파 계획을 실행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더 큰 거사계획을 세워 기회를 기다리다 일제의 추적을 받아 포위됐다.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피신했고, 마침내 효제동 은신처가 탄로나 약 1000명의 군경에 의해 4중 포위를 당했다. 그는 단신 쌍권총을 들고 3시간이나 대항했다. 그러나 혼자 몸으로 4중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탄환이 다해 가자 일제에 붙잡혀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상옥 의사가 심혈을 기울였던 ‘혁신공보’ 제34호에는 안창호 선생의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사를 실었다. 그 일절에 “우리가 우리 주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위에 모범적인 공화국을 세워 이천만으로 하여금 천연(天然)의 복락을 누리려 함이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달라는 말이었다. 김상옥 의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고귀한 밀알이 됐다.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 수많은 김상옥들이 배출됐다.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정신, ‘비(非)노블레스들의 오블리주’ 정신의 놀라운 대분출이 일어났다. 필자는 이것이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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