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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전통주는 눈물을 마십니다

잊혀졌던 술 ‘감홍로’를 재현한 이기숙 명인이 전통방식으로 누룩을 빚기 위해 밀을 절구로 곱게 빻던 중에 잠시 쉬면서 술 향기를 맡고 있다. [사진 현대백화점]
토끼는 자꾸만 별주부를 의심했다. 그러자 별주부는 “용궁에 가면 감홍로(甘紅露)를 마실 수 있단다” 하고 토끼를 꼬드겼다. “나를 따라 수부(水府)에 들어가면 선경(仙境)도 구경하고 감홍로로 매일 장취(長醉)하고….”



'조선 3대 명주' 감홍로의 수난사

 성춘향도 이몽룡이 한양으로 떠나던 날, “우리 처음 만날 제 합환주를 먹었으니 오늘 서로 떠날 적에 이별배가 없을 테요”라며 이별주로 감홍로를 이도령과 반 잔씩 나눠 마셨다.



 옛 소설에 나오는 달고 붉고 이슬 같은 술, 감홍로는 실제로 있었다. 민속학의 권위자이기도 했던 육당 최남선은 1946년 저서 『조선상식문답』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평양 감홍로, 그 다음은 전주 이강고(梨薑膏), 그 다음은 전라도 죽력고(竹瀝膏)이니 이 세 가지가 조선 3대 명주(名酒)”라고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도 백과사전의 일종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평양의 3대 명물로 감홍로와 냉면·골동반(비빔밥)을 꼽았다.



 하지만 감홍로는 6·25를 거치면서 사라져버렸다. 2005년 북한의 ‘통일문학’지에도 3대 전통주로 이강고·죽력고와 함께 등장했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구할 길이 없었다. 정말 용궁에나 가야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술이 돼버린 것이다.



 그런데 올 추석 때 현대백화점이 ‘조선 3대 명주 세트’라는 이름으로 감홍로·죽력고·이강고를 묶어 30만원에 내놓았다. 이 백화점 권순건 바이어는 “전통주를 대중화하자는 취지로 내놓았지만 크게 기대는 안 했다”고 말했다. 고가인 데다 알코올 도수가 40도 정도로 높고, 덜 알려진 술이라 50세트 정도 파는 것이 목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157세트가 팔렸다. 현대백화점은 감홍로 등을 매장에 정식 입점시켰다. 요즘도 하루 3~4병은 꾸준히 판매된다. 이름만 남았던 술이 시장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감홍로를 빚은 ‘식품명인’은 여성이었다. 용궁도, 평양도 아닌 경기도 파주읍 부곡리의 술도가로 그를 만나러 갔다.



 “술 분야 무형문화재 1호인 아버지를 거들어 드리면서 20대 때부터 감홍로 빚는 법을 배웠어요. 하지만 제조허가도 받기가 쉽지 않더군요. 2007년에야 숙성도 미처 못한 술을 내놓을 수 있었어요.”



 이기숙(56) 명인의 ‘감홍로 재현기’는 그 자체로 오롯이 전통주 수난기다. 그의 선친은 일제시대 때 평양에서 대형 양조장을 운영했던 포암 이경찬(1915~93) 선생이다. 선친은 피란 오면서 양조장을 접어야 했다. 54년 양곡관리법으로 곡식으로 술을 못 빚게 되면서 증류주 생산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위스키’란 별명처럼 감홍로는 조와 쌀로 만든 술을 증류해 만든 소주다. 선친은 “알코올을 섞어 만드는 희석식 소주는 술이 아니다”라며 가업을 접어버렸다. 곡식으로 빚던 전국의 전통주가 같은 식으로 사라졌다. 이 명인은 “집안 행사 때나 쌀 한두 말로 몰래 술을 빚으실 때면 술항아리 옆에서 쪽잠을 잘 정도로 애지중지하셨다”고 회고했다.



 86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술 분야 무형문화재를 모집하면서 선친이 ‘문배주’ 문화재로 선정된 것이다. “30여 년의 한이 풀렸다”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술 제조 허가가 없다 보니 발표회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90년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된 전국 전통주를 시판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문배주가 세상에 나왔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만찬에도 오르는 등 명성을 얻었다. 선친의 뒤를 이어 큰오빠 이기춘(71)씨가 지금도 문배주를 빚고 있다.



 하지만 선친이 아꼈던 또 다른 술 감홍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이 명인은 “문화재 자격은 한 가지 술에 대해서만 받을 수 있고, 술 관련 추가 문화재 지정은 하지 않기로 방침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우루과이라운드를 앞둔 93년 식품명인도 술을 빚을 수 있다는 새 제도가 생겼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 명인보다 열세 살 많은 둘째 오빠 이기양씨가 명인 칭호를 받았다. 남매가 함께 감홍로 생산을 준비해오다 세상에 술이 나올 때쯤인 2000년 오빠가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너무 막막했어요. 제가 다시 명인으로 지정받기 위해 애썼지만 아버님도 이미 돌아가신 데다 내가 수십 년 담근 술이라고 외쳐도 ‘근거가 없다’며….”



 명인 인증을 받으려고 다니는 동안 담당 부서도 계속 바뀌고 사무관도 대여섯 명이 바뀌었다. 보다 못한 한 공무원이 “일단 농업법인을 설립하라”고 귀띔했다. 농민주(지역특산주)로 허가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주세법은 전통주를 민속주와 지역 특산주로 규정한다. 민속주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전통문화의 전수·보전에 필요하다고 인정돼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이나 식품산업진흥법에 따라 전통식품 명인으로 지정한 사람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농민주는 영농법인 등이 직접 생산하거나 인근 시·군·구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주원료로 사용하면 된다.



 2005년 남편 이민형(59)씨가 대표를 맡고 1억원을 투자해 경기도 파주에 술도가를 세웠다. 용의 눈알을 닮은 용안육 등 여덟 가지 한방 약재를 잘 우려내 숙성시킨 술에선 선친의 향기가 났다. 2007년 술이 세상에 나왔지만 판로도 홍보도 쉽지 않았다. “술맛이 좋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며 두어 병 전화주문을 후불제로 팔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한 해 1억원꼴로 적자가 났다. 부부는 “7억원을 쏟아붓고 나니 담보 대출도 이젠 안 된다”며 “감홍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마음으로 버티는 상황”이라고 열없이 웃었다.



남모르게 말라가는 ‘우리 술’ 시장



다행히 지난해 10월에 식품명인으로 뒤늦게 지정되면서 마음의 짐은 다소 덜었지만 앞일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명인은 “이미 빚어놓은 술이 많아 최근에는 술을 더 빚지 않고 숙성만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자금을 지원받으려면 3년(현재는 5년) 이내 실적이 있어야 하는데 충분히 숙성시켜 팔아야 하는 감홍로 같은 술은 이 기준을 맞추기 어렵다”며 “7년 정도로 늘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민형 대표는 “전통주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제조업체와 소비자를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마케팅 채널이 필요하다”며 “군소 전통주 업체들이 힘을 모아 대형화를 통해 공동으로 판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민주 등이 허용되면서 전통주 제조업체 수는 2000년 115개에서 2011년 576개로 5배가 됐다. 하지만 매출액은 2005년 924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하향세로 돌아서 2011년에는 418억원에 불과하다. 막걸리 인기로 2010년 반짝 상승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수입 와인뿐 아니라 2010년부터는 수입 맥주에도 뒤졌다. 그 격차도 점점 커지고 있다. 전통주는 직원 수 5명 이하의 영세업체가 대부분이다. 대구 무형문화재 11호인 하향주(荷香酒) 생산업체는 올여름 대출금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경매에 넘겨질 뻔하기도 했다. 400년 전통의 남한산성소주를 만들던 경기도 광주의 양조장도 당분간 도수가 높은 소주 대신 대중적인 ‘참살이 탁주’에 주력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정부와 기업 등이 나서면서 전통주 시장에도 희망의 싹이 보인다.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근무하던 올해 초 ‘한국의 주류제도와 전통주산업’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의 전통주 전문가다. 올 6월부터 농림부는 지역 명인들의 양조장을 발굴해 체험 프로그램과 접목한 관광상품 ‘찾아가는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다. 시설을 현대화하고 디자인을 개선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방안도 나왔다. 국세청은 토속상품을 취급하는 도매상도 전통주를 판매하게 했다. 세율을 낮추고 면허 기준도 완화했다.



 민간 차원에서도 전통주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전통주도 배송이 가능한 특수 진공포장을 3개월에 걸쳐 개발했다. 병 디자인도 다시 했다. 도수가 지나치게 높아 젊은 층이 꺼린다는 점을 감안해 오미자를 섞은 칵테일 같은 레시피도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한국전통주진흥협회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전통주 20종의 라벨과 용기, 포장 박스 등을 전부 새롭게 디자인하기로 했다.



 이 명인은 “내가 안 하면 문헌에만 남게 된다는 생각으로 술을 빚고 있다”며 “아들딸이 내 뒤를 이어줬으면 좋겠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길을 강요할 수 없어서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가 잔에 부어준 달콤한 약초 향이 나는 은은한 붉은빛의 술이 피눈물처럼 보였다.



파주=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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