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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닮은 섬 … 삶이 무거울 때 그 섬에 가고 싶다

남이섬이 물안개에 젖은 이른 아침, 가을은 비로소 완성된다. 남이섬=손민호 기자
11월이다. 며칠 전만 해도 샛노랗던 가로수 은행잎이 길바닥을 뒹구는 날, 나는 문득 내 나이를 세어본다. 그리고 중년이라는 나이를 생각한다.

손민호의 힐링투어 ② 가을 끝자락, 남이섬의 아침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중년의 가을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왕년에는 신문에 글을 썼고, 지금은 소설을 쓰는 어느 선배 기자의 에세이에서 읽은 구절이다. 에세이를 처음 읽던 삼십 대의 나는 이 배배 꼬인 심사 앞에서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서너 해 전에 마흔 문턱을 넘어선 지금의 나는 이 구절을 주문이라도 되는양 입에 달고 산다. 아니, 단 한 하루도 이 저주와 같은 문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사오십대 즈음은, 인생의 단계에서 타성이라는 낱말로 해석되는 시기인지 모른다. 더 이상 새로운 게 없는 삶, 더 이상 새로운 걸 찾지 않는 또는 찾지 못하는 삶. 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무료하고 지리멸렬한 삶. 지금의 나는 점심밥도 어제 앉았던 자리를 다시 찾아가 앉아서 먹고, 노래방에서는 신곡을 언제 눌렀는지 기억에도 없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같은 칸 같은 출입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내일은, 이제 내 남은 인생에서 멸종하고 말았다.

남들은 이 먹먹한 일상에서 벗어나려 여행을 떠난다지만, 불행히도 나는 낯선 땅에서도 타성과 맞닥뜨려야 한다. 10년 가까이 여행을 밥벌이로 삼은 죗값이다. 허구한 날 돌아다니는 게 업이다 보니 이제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게 시들해져 버렸다. 푸르디푸르던 저 봄날의 숲도, 그 곱다는 시월 한계령의 단풍도 더 이상 내 가슴을 덥히지 못한다. 죗값치고는 혹독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있으려고 바둥댄다. 가장(家長)이라는 무게를 생각하면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맥 풀린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할 때 나는 46번 국도에 오른다. 지금처럼 늦은 가을, 늦은 저녁이면 더 좋다. 그래도 시간은 지켜야 한다. 오후 9시40분.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막배 시간이다.

모닥불을 쬐는 눈사람 인형. 남이섬다운 소품이다.
어디가 단풍이고 어디가 허공인지
늦가을 이른 아침. 남이섬은 물안개에 휩싸인다. 아직 사위가 희붐한 시각, 물안개 자욱한 남이섬은 낯선 장면을 연출한다. 물안개가 붉고 노란 단풍과 뒤엉켜 허공을 붉고 노랗게 분칠한다. 붉고 노란 단풍이 허공에 번져 제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내면 어디까지가 단풍이고 어디까지가 허공인지 분간이 안 된다. 옅은 잿빛의 세상에 붉고 노란 물감을 몇 방울 떨어뜨린 듯한 풍경을 보고, 누구는 파스텔화 같다고 하고 누구는 수묵채색화 같다고 한다. 나는 한 권의 시집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 숲에 들어가 낙엽을 밟는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푹푹 발목까지 들어간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낙엽을 밟으면 발바닥을 통해 물컹거리는 감각이 전해온다. 한없이 땅이 꺼지는 듯한 아득한 찰나다. 얼른 발바닥을 들어 무게를 옮기려 하지만, 이미 발목까지 파묻힌 뒤다. 잔뜩 긴장한 채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성가신 듯하면서도 재미있다. 낙엽이 떨어지면 부리나케 치우는 서울 시내 거리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다. 적막한 새벽 섬에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만 호수에 이는 파문 모양 사위에 울려 퍼진다.

섬 끄트머리에 있는 은행나무 길 앞에 선다. 흙길이 온통 노랗다. 노랑 융단이라도 깔아놓은 듯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이어서 함부로 밟는 것조차 미안하다. 긴 숨 한 번 내쉬고 나서 두툼한 낙엽길 위에 살그머니 발을 올려놓는다.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무도 밟지 않는 눈밭에 처음 발자국을 남겨본 적 있으면 무슨 얘기인지 고개를 끄덕일 터이다.

늦가을 이른 아침 남이섬은, 누구나 꿈꾸는 가을날의 미장센(mise-en-scéne:극적인 장면)을 성공리에 재현한다. 내가 이 계절이면 남이섬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는 이유다. 오전 7시30분 출발하는 첫배를 타면 늦다. 이미 날이 밝아올뿐더러 물안개가 잦아들어서다. 무엇보다 첫 배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분위기가 깨진다. 기껏해야 오전 6시쯤부터 두어 시간 누리는 호사지만, 그 시간이 아까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 비밀을 털어놓을 차례다. 남이섬이 풀어놓은 가을 풍경은 치밀한 연출의 결과다. 앞서 미장센이란 연극 용어를 구사한 이유다. 다들 남이섬의 자연을 말하지만, 남이섬은 자연이 빚은 선물이 아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나 하나 일구고 가꾼 산물이다.

빈 소주병을 녹인 뒤 붙여 만든 조형물. 모든 걸 재활용하는 남이섬을 상징하는 소재다.
감동이 있는 ‘인공 자연’에 감탄사가
애초부터 남이섬은 섬 축에도 끼지 못했다. 1944년 청평댐이 완공돼 북한강 수위가 고정된 다음에야 섬이 되었다. 그 시절 남이섬은 버려진 모래밭이었다. 황량한 모래밭에 나무를 심은 건 65년부터였다. 처음에는 나무를 심는 족족 말라죽었다. 그래도 또 심었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끼리, 단풍나무는 단풍나무끼리 모아서 심었다. 물안개에 단풍이 번져 보이는 건, 단풍나무가 뭉쳐 있어서다. 흙도 무지하게 퍼 날랐다. 수백 트럭 분량의 마사토를 깔고 땅을 다졌다.

낙엽도 만들어낸 풍경이다. 남이섬 은행나무가 제 아무리 잎이 무성해도 이만큼 길을 덮지는 못한다. 남이섬은 2006년부터 서울 송파구청으로부터 낙엽을 들여와 길에 깐다. 100m 남짓한 은행나무 길은, 송파구에서 보내준 은행잎 100t으로 노랗게 포장된다. 올 가을엔 지난주에 1차 분이 들어왔고, 다음주에 2차 분이 들어온다. 낙엽이 마르면 모닥불을 지핀다. 겨울 남이섬은 낙엽 태우는 연기로 자욱하다. 모닥불로 모여든 사람들이 오랜만에 낙엽 타는 냄새에 젖는다. 낙엽은 가을과 겨울 남이섬의 간판 상품이다.

말하자면 남이섬의 자연은 ‘인공 자연’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정성과 감각에 말문이 막힌다. 이를테면 겨울에 눈이 안 오면 남이섬의 전 직원이 출동해 얼음을 만든다. 밤새 나뭇가지에 물을 뿌려 고드름을 매달고, 수영장 물을 얼려 얼음조각을 설치한다. 사람들이 겨울 남이섬에 기대하는 풍경을, 남이섬은 어떻게든 만들어 놓는다. 남이섬은 우리가 꿈꾸는 계절의 미장센을 만들고, 그 미장센을 판다.

나는 남이섬에 들어올 때마다 놀란다. 사소한 것이라도 무언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남이섬을 제법 안다고 떠들고 다니지만 남이섬에 들어올 때마다 내 자신감은 보기 좋게 박살난다. 남이섬에 들어오면 적어도 타성이라는 단어는 잊게 된다. 일상에 찌든 중년의 얼굴은 신기한 걸 발견한 아이의 그것처럼 환해진다. 남이섬에서만큼은 나이를 세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고맙다.



남이섬
서울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춘천 방향으로 1시간쯤 달리다 보면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가평선착장이 나온다.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첫 배는 오전 7시30분에 있고, 막배는 오후 9시40분에 있다. 남이섬에서는 5분마다 배가 뜬다. 주차비 4000원. 입장료 1만원. 남이섬 안에 ‘정관루’라는 이름의 호텔이 있다. 객실이 모두 46개밖에 되지 않아 일찍 예약하지 않으면 방을 얻기가 쉽지 않다. 객실 46개 중에서 44개가 이른바 테마 객실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이용해 손수 꾸미거나 남이섬에서 맺은 인연을 남겨두어 방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이를테면 203호는 ‘겨울연가’를 촬영할 때 배용준이 묵었던 방으로, 배용준의 사진이 걸려 있다. 2인용 주말 9만9000원, 주중 7만7000원. www.namisum.com, 031-580-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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