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무신정권의 역설 … 정권 지키려 과거 급제자 대폭 증원

북문에서 바라본 강화산성. 1232년 강화 천도 당시 축조된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소재. 조용철 기자
고려의 최고 문장가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년)는 37세 되던 해(1204년) 재상 최선(崔詵)에게 벼슬자리를 얻으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고려사의 재발견 이규보와 강화 천도

“선비가 벼슬을 하는 것은 구차하게 일신의 영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정사에 반영하여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을 찾고 왕실에 힘을 보태 길이 이름을 남기고자 합니다. …인생은 백세라지만 칠십을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삼십에 벼슬에 오르더라도 오히려 늦다고 하는데, 제 나이 지금 삼십칠 세입니다. 어릴 때부터 쇠약하고 병이 많아 삼십사 세에 흰 털이 보이더니 뽑아도 다시 나기를 그치지 않아 지금은 반백입니다.”(『동국이상국집』 권26 재상 최선에게 올리는 글)

23세 때(119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14년 동안 백수로 지내다 보니 머리조차 반백(半白)이 되었다는 구차한 얘기도 담겨 있지만, 벼슬자리 하나 얻으려는 그의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에도 이규보는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다른 재상에게도 같은 취지의 편지를 썼다.

“예전엔 과거에 합격하면 바로 지방관에 임명되고, 늦더라도 3~4년 안에 다 임명되었습니다. 요즈음 문관들이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빨리 진출하는 사람이 많고, 지방관청이 늘지 않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거의 임명되지 못한 채 밀려 30년 혹은 28, 29년이 되도록 임명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동국이상국집』 권26 조태위(趙太尉)에게 올리는 글)

이 글에서 이규보는 자기처럼 청탁을 하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리다간 30년을 넘겨도 발령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18년 백수’의 이규보가 왜 이토록 청탁의 편지를 썼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무신정권 당시 과거 합격자들의 일반적인 처지가 이규보와 비슷했음은 다음의 통계 자료가 뒷받침한다.

100년간 합격자, 전체의 33%인 2229명
고려 500년 동안 과거 합격자(최종 시험인 예부시 합격자)는 현재 확인된 바로는 6735명이다. 무신정권 100년간 합격자는 전체의 33%인 2229명이나 된다. 기간을 감안할 때 산술적으로 20% 정도가 정상일 것이다. 과거와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무신의 시대인 점을 감안하면 그 이하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전체 합격자의 33%가 이때 배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기간에 1회 평균 선발인원은 34.9명(전체 평균 27.7명)이었고, 시험간격은 평균 1.4년(전체 평균 1.7년)으로, 무신정권 때 더 자주 과거를 치르고, 더 많이 뽑았다는 얘기다. 합격자 숫자가 많아지면서 관직 대기자 숫자는 1205년(희종1) 452.5명, 1210년(희종6) 461.1명, 1215년(고종2) 525.8명으로 늘어난다(*소수점은 평균사망률 적용 때문). 고려왕조 건국 후 가장 심한 인사 적체 현상이 생긴 셈이다(허흥식,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 1981년).

왜 무신 권력자들은 과거를 자주 치르고, 시험 때마다 합격자 수를 늘렸을까? 그 이유는 과거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주어 정권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합격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관리가 되려면 또 다른 관문인 ‘천거’를 거쳐야 했다. 이규보가 요로에 자신을 관리로 추천해 달라는 편지를 쓴 것은 이 때문이다. 요직에 있던 관리들은 정권에 충성을 다할 인물을 이리저리 따져본 다음 최고 권력자에게 천거했다. 과거제 위에 천거제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은 천거를 통해 정권에 철저하게 충성하는 자를 가려내었다. 정권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 바로 무신 권력자가 바라는 관료상이었다. 그래서 천거야말로 관리가 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었다.

그러나 천거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최충헌은 이규보를 세 번이나 만나 그의 자질을 시험한다.

첫 번째는 1199년(신종2) 5월이다. 이때 최충헌은 집 마당에 석류꽃이 활짝 피자 당대 최고의 시인인 이인로(李仁老)·함순(咸淳)과 함께 이규보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그의 시재(詩才)를 눈여겨본 후 다음 달 전주목사를 보좌하는 속관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이규보는 1년 만에 목사와의 불화로 그만둔다.

1202년(신종5) 12월 경주에서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 각종 문서를 작성할 관원을 모집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이규보가 자원해 진압군의 일원으로 주요 산천에서 반란을 진압할 제문(祭文) 작성을 전담했다. 1204년 반란을 진압하고 개선했으나 그는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천거가 없이는 험한 싸움터를 아무리 누벼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이에 실망한 그는 “이번 싸움에 세운 공이 누가 제일이냐, 지금도 지휘한 사람은 기억조차 않는다네”(『동국이상국집』 연보)라며 서운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207년(희종3) 최충헌은 당대 문사인 이인로 등과 함께 이규보를 초대하여 그가 새로 지은 모정(茅亭ㆍ지붕을 띠로 덮은 정자)의 기문(記文)을 짓게 했다. 이때 이규보는 1등으로 뽑힌다. 최충헌은 이규보를 임시직인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임명했다가 이듬해 비로소 정식 관원으로 임명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는 곧 뛰어난 문재(文才)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ㆍ1219∼1249년 집권)의 눈에 들었다.

세 번째 기회는 최이가 마련한다. 1213년(강종2) 이규보의 나이 46세 때 최이는 다시 최충헌에게 그를 천거한다. 최충헌은 그의 집 마당에 노니는 공작에 대해 시를 짓게 했다. 이규보의 시를 보고 최충헌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단숨에 7품으로 승진한다. 비로소 최씨 정권 최고의 문사로 활약할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강화 천도 후 축조된 고려 궁궐 터(북문 아래 소재). 조용철 기자
동기생 유승단, 천도 반대하다 의문사
고구려의 주몽을 노래한 유명한 서사시 ‘동명왕편’은 이규보가 과거에 합격한 지 3년이 지난 1193년에 지었다. 26세 때이다. 이규보는 과거에 합격한 20대 시절 이미 개경에서 문재(文才)를 떨쳤다. 그렇지만 쉽게 관료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다 최고 권력자의 천거를 얻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발탁된 그가 최씨 정권에 충성을 바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231년 8월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한다. 최고 권력자 최이는 1232년(고종19) 6월 마침내 200년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에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 선봉에 선 이가 유승단(兪升旦ㆍ?∼1232년)이다. 그는 이규보와 함께 1190년(명종20) 과거에 합격한 동기생이다. 두 사람은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인이자 지식인이었다. 유명한 고려가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품평한 기록이 있다. ‘고문(古文)은 유승단, 빨리 글을 짓는 주필(走筆)은 이규보가 각각 최고’라 했다. 이규보는 자신이 지은 시 뭉치를 유승단에게 보내 윤문을 부탁할 정도로 둘 사이는 절친한 문우(文友)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승단은 강화도 천도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섬김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귀면, 저들은 무슨 명분으로 매양 우리를 괴롭히겠습니까? 성곽을 버리고 종묘와 사직을 돌보지 않은 채 섬으로 도망하여 구차스럽게 세월을 끄는 동안 변방의 백성과 장정들은 적의 칼날에 다 죽고 노약자들은 노예와 포로가 될 것이니, 천도는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고려사』 권102 유승단 열전)

유승단이 천도에 반대한 것은 태자 때부터 모셔온 고종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 고종은 천도 후 한 달이 지나 강화도에 갈 정도로 천도에 미온적이었다. 그가 일찍 재상이 된 것도 고종의 후광이었다. 천도 두 달 후인 8월 유승단은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 역시 예사롭지 않다. 민심도 천도에 대해 냉담했다. 당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국가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지금 개경은 10만 호나 되었고, 단청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며, 사람들도 자신의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고 천도를 곤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이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다.”(『고려사절요』 권18 고종 19년 6월조)

천거제 활용해 무신정권 100년간 유지
이규보는 천도를 강행해 정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자 최이의 의중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도에 찬성하는 글을 올린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하늘로 오르기만큼 어려운 일, 마치 공을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 천도 계획을 서두르지 않았으면, 우리 삼한은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일세. 쇠로 만든 듯이 크고 단단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물결, 그 공력을 비교하자면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천 만의 오랑캐 기마병이 새처럼 날아온다 해도, 눈앞의 푸른 물결을 건널 수 없으리.”(『동국이상국집』 권18)

이규보는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삼한은 벌써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며 천도를 옹호했다. 천도에 대한 이규보의 진심은 알 길이 없지만, 최이의 천거로 최씨 정권의 문객이 된 그로서는 천도 반대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규보는 천도 이듬해인 1233년 재상이 된다. 초고속 승진이다. 이후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 몽골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직접 작성할 정도로 최씨 정권의 철저한 이데올로그가 된다. 왜 무신권력자가 천거제를 통해 관료를 충원했는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무신정권이 100년이나 유지된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선데이 배너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