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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만의 만남, 요절한 내 형의 노래

러시아 출신 트럼펫 연주자 티모페이 독쉬체르. 현대의 많은 작곡가가 그에게 작품을 헌정했다. [www.dokshizer.com]
마음이 답답할 때나 혹은 멋진 여행을 준비할 때 파가니니의 ‘베니스의 축제’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특히 트럼펫 연주로. 경험에 의하면 기분 전환에 이만 한 메뉴도 드물 것 같다. 이 곡은 쇼팽 버전의 매력적인 피아노 연주도 있고 바딤 레핀의 발랄하고 힘있는 바이올린 연주도 있다. 그러나 역시 트럼펫 연주로, 그것도 러시아의 트럼펫 명인 티모페이 독쉬체르(1921~2005)의 연주로 듣는 것이 최상의 선택일 것이다. 비록 길지 않은 곡이지만 그가 이 곡을 연주하는 걸 들어보면 높은 명성을 금방 수긍하게 된다. 그는 국내 사이트에도 이미 많이 소개되고 있고, 그에 대한 찬사는 너무 많아 어떤 점을 강조해야 할지 난감하다. 레퍼토리 역시 트럼펫 주자로는 전례 없이 광범위해 어느 곡을 선택해 들어야 할지, 그 문제도 쉽지가 않다.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트럼펫 연주자 티모페이 독쉬체르

트럼펫이란 악기는 사실 현대에 와서 크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독주 악기로는 더욱 그렇다. 바로크 이래 트럼펫 창작곡이 줄어든 것만 봐도 그 사실은 입증된다. 그러나 티모페이의 경우는 예외다. 초절기교로 일컬어지는 발군의 기량과 높은 음악성으로 트럼펫 곡뿐 아니라 현악기·건반악기 곡에까지 영역을 넓히고 트럼펫을 당당한 독주 악기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뛰어난 연주 기법에 현악기나 목관악기 주자들이 도리어 자극과 영향을 받았다는 사례들이 나와 있다. 연주 기량이 트럼펫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에 이르렀다는 동구(東歐) 어느 신문의 평가도 있다. 마치 벨칸토 창법에 숙달된 이탈리아의 어느 테너가 아리아를 부르듯 유연하고 부드럽게, 때로 민첩하고 날카롭게 트럼펫으로 노래를 한다.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하듯 트럼펫으로 노래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국내에서 나온 티모페이 독쉬체르 독주 음반.
‘오! 꿈속에 오라. 가장 고요한 시간에 오라. 언제나 밤에 로라가 페트라르카에게 왔듯이….’ 리스트의 가곡 ‘오! 꿈속에 오라(Oh! quand je dors)’가 표제로 된 음반으로 나는 이 트럼펫 명인과 처음 만났다. 1990년대 초반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브스키 사원 입구에 늘어선 음반 노점상을 통해서였다. 트럼펫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나 표제가 된 빅토르 위고의 이 서정시 때문에 그 음반에 끌렸다. 노래는 리스트의 피아노곡 ‘사랑의 꿈’을 연상케 하는 매우 낭만적인 곡이다. 음반에는 리스트를 비롯해 쇼팽·드뷔시·슈베르트 등 다양한 성격의 노래와 낭만적 소품들이 수록되어 있고 ‘트럼펫의 음유시인’이란 호칭에 걸맞은 티모페이의 풍모와 기량을 잘 보여준다.

두 번째 그를 만난 것은 2005년도 모스크바 전자상가에서였다. 원래 우랄합창단의 ‘레비니슈카(레비냐의 노래)’ 음반을 구하려고 그곳에 갔는데 티모페이 독쉬체르의 음반이 눈에 띄어 내용도 살피지 않고 그냥 쓸어 담았다. 레비니슈카는 레비냐라는 열매 나무와 참나무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지만 강 때문에 더 가까워질 수 없다는 러시아 민담을 소재 삼은 노래인데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레비냐 나무가 밤에 불빛에 비칠 때는 무척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숙소로 와서 보니 ‘Japanese Melodies’라는 표제의 음반이었다. 미리 알았다면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태여 트럼펫으로 일본의 가요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가 일본 연주여행 길에 일본의 서정적 노래들에 끌려 음반을 낸 것 같다. 한동안 음반을 방치해 두다 한가한 시간에 문득 긍금증이 발동했다. ‘어떤 노래인데 이 트럼펫 명인이 끌렸을까?’ 즉시 음반을 컴포넌트에 걸고 방의 중간에 엉거주춤 서서 연주를 들었다. ‘꽃’이라는 첫 곡은 그냥 밋밋했다. 두 번째 곡은 나카타 아키라란 사람의 ‘이른 봄의 노래’라는 곡인데 첫 소절이 끝나기 전 나는 벌써 온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심장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이 선율은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노래의 가사까지 한 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냈다. ‘이름만 봄일 뿐 찬 바람이 일고, 골짜기 꾀꼬리도 때가 이르다 생각해선지 울지도 않는구나. 얼음이 녹고 갈대 싹 트니 봄이 왔구나 했는데 오늘도 어제도 눈 날리는 하늘.’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후에 일곱 살 터울인 형에게서 배운 노래였다. 그 형은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던 음악 지향적인 소년인데 17세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날 이후 나는 한 차례도 ‘이른 봄의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하루도 그 형의 비극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니까 거의 60년 만에 모스크바 변두리 허름한 아파트에서 이 노래와 다시 만난 것이다.

티모페이와의 만남에는 극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가 서정적인 노래들에 특별한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그의 이름도 몰랐을 것이고 트럼펫이란 금속 악기에 관심을 갖지도 못 했을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하듯 트럼펫으로 따뜻하고 부드럽게 노래하는 티모페이 독쉬체르. 그는 트럼펫의 파가니니라고 할까. 파가니니의 ‘베니스의 축제’에서도 그는 절정의 기교와 따뜻한 감성 등 트럼펫의 가객(歌客)다운 풍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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