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왕둥싱 “덩샤오핑, 시험해 봤지만 좀 빠지는 인물”

문혁 발동 이듬해인 1967년 여름, 난징(南京)의 창장(長江) 부두에서 배를 기다리는 마오쩌둥을 왕둥싱(오른쪽 둘째)이 경호하고 있다. 옆에 같은 복장을 한 남성은 마오의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사진 김명호]
세계적인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부인 중 한 사람이 회고록을 남겼다. “세상에 파(罷)하지 않는 파티는 없다.” 20여 년 전 홍콩에서, 표지 제목만 보고도 끼득거리는 노인들을 많이 봤다. “멋진 제목이다. 외교관들이 허구 한 날, 이상한 옷 입고 여는 파티도 돈만 까먹었지 별 게 아니구나. 위대한 문화대혁명과 똑같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8>

혁명이나 전쟁을 파티 정도로 여겨는 민족이라 그런지, 중국인들은 온 천지가 소용돌이에 휩싸여도 “납작 엎드려만 있으면 결국은 끝날 날이 온다”며 낙관적이다. 적응력도 뛰어나다. “제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놈도 인생의 결말은 비극이다. 무슨 일이 닥치건, 살아있을 때 오만상 찡그리지 말고 실컷 웃자”는 화가 황융위(黃永玉·황영옥)의 말에 거의가 공감한다.

이해의 폭이나 융통성도 따라갈 민족이 없다. 변화가 닥치면 신념은 일단 접어두는 경우가 많다. 내로라하는 혁명가나 직업 정치가들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보수와 진보, 좌·우를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왕둥싱(汪東興·왕동흥)은 특이한 존재다. 평생 머리 속에 마오쩌둥 한 사람밖에 없었다. 화궈펑만은 존중했다. 마오쩌둥이 지정한 후계자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화궈펑·예젠잉과 함께 4인방을 체포한 1976년 10월 6일 밤, 왕둥싱은 베이징에 거주하는 중앙 정치국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 10시, 교외에 있는 예젠잉 원수의 거처에서 긴급회의가 열린다. 빠짐없이 참석하기 바란다. 화궈펑 부주석의 명령이다.” 엉겁결에 달려온 정치국원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리셴녠(李先念·이선념)조차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예젠잉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덩샤오핑(오른쪽)과 천윈,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항상 서로를 추천했다. 1952년 베이징 이허위안(頤和園).
화궈펑이 “4인방을 체포했다”며 예젠잉에게 발언을 청했다. 예젠잉은 2년 전 일을 거론했다. “1974년 7월 17일, 마오 주석은 4인방을 비판했다. 4인방 체포는 정치국 소수 인원의 결정이 아니다. 우리가 갑작스럽게 취한 행동도 아니다. 주석은 생전에 해결을 미루고 있을 뿐이었다. 두 시간 전, 마오 주석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4인방을 체포했다.” 참석자들은 왕둥싱을 힐끔 쳐다봤다. 왕둥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회의장에 환호와 박수갈채가 터졌다. 흥분이 심하다 보니 심장발작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간 정치국원도 있었다.

회의는 예젠잉의 제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화궈펑을 당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에 추대한다. 왕둥싱 주재 하에 마오쩌둥 선집 5권을 출간하고, 베이징에 주석의 기념관을 건립한다. 4인방과 추종세력에 대한 심사는 왕둥싱에게 전권을 일임한다.”

10월 7일 오후, 예젠잉의 아들이 헐레벌떡 자전거를 타고 덩샤오핑의 연금 장소를 찾아왔다. 4인방 체포소식을 들은 덩샤오핑은 왕둥싱의 근황부터 물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자 가족들을 데리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란 수도꼭지는 다 틀어놓고 “어젯밤, 4인방이 체포됐다. 왕둥싱이 참여했다니 안심이다. 나도 이제는 만년을 편안히 보내게 됐다”며 입조심을 당부했다.

덩샤오핑의 복귀를 주장하는 사람이 한두 명 생겨나기 시작했다. 왕둥싱은 반대했다. “덩샤오핑의 총리 기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덩샤오핑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잘 안다. 능력도 조금 있지만, 시행착오가 더 많았다. 1975년, 마오 주석도 총리 기용을 검토한 적이 있다. 시골 구석에 쫓겨가 있는 걸 데려다 시험해 봤지만 좀 빠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화궈펑은 주석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다.”

1977년 3월, 중앙공작회의에서 천윈(陳雲·진운)이 덩샤오핑을 지지하고 나섰다. 왕둥싱은 천윈의 직무 태도를 비판했다. “천윈은 앞장서기를 싫어하고 박력이 부족하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눈치꾸러기다. 뭐든지 원만한 것만 숭상한다. 마오 주석도 시골 부자의 첩 같은 짓만 골라서 한다고 했다.”

전 베이징 시장 펑쩐(彭眞·팽진)과 전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보이보(薄一波·박일파)의 복권에도 반대했다. “한때 펑쩐은 독립왕국의 두목이었다. 보이보는 당을 배반한 적이 있다. 마오 주석이 배신자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을 업무에 복귀시키면 우리 당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지하의 마오 주석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전 세계가 우리를 뭘로 볼지 한번 생각해봐라.”

우여곡절 끝에 복귀한 덩샤오핑도 왕둥싱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 부주석과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자격으로 중앙당교에 가서 공개적으로 깔봤다. 4인방과 일전을 불사했던 이유로 덩샤오핑의 위상이 화궈펑을 능가했을 때였다. “덩샤오핑이 4인방과 투쟁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영명한 화궈펑 주석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는 없다. 저우언라이 총리 사후 다들 덩샤오핑이 총리가 될 줄 알았지만 주석은 화궈펑 동지를 낙점했다. 덩샤오핑은 4인방에 의해 쫓겨난 적이 있다. 화궈펑이 없었더라면 복귀가 불가능했다. 지금쯤 집안에서 여생을 보내는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을 사람이다.”<계속>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