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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의 시대공감] 손바닥에 쓴 답

공직생활을 하면서 국제기구에 몇 년 근무할 기회를 얻은 것은 큰 행운이었다. 특히 국외자(局外者)로 취급받는 파견자 신분이 아니라 정식 직원으로 채용돼 내부에서 ‘피나는’ 경쟁을 한 것이 더욱 그랬다. 국제 업무 경험 못지않게 국제기구의 일하는 방식과 조직 문화를 체험한 것도 나름 큰 수확이었다. 국장 시절 워싱턴에 있는 세계은행(IBRD)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업무에 대한 높은 집중도(intensiveness)였다. 근무시간에 신문을 보거나 잡담을 하는 직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회의는 최대한 짧게 했다. 구내식당에서 음식을 사서 자기 사무실에서 간단히 먹는 직원들도 많았다. 수행한 모든 프로젝트는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야 했다.

일 년에 열 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조직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일 년쯤 지나 직원에 대한 정기평가 철이 왔다. 상급자로부터 내 일에 대한 평가를 받아보고 거꾸로 아래 직원을 평가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답의 일단(一端)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성과’라는 괴물(?)이었다. 아무도 각자의 출퇴근 시간이나 시간관리 방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결국은 성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일하는 시간이나 근무 기강과 같은 자원(resources)이 투입되는 ‘들어가는 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오는 문’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과와 아울러 ‘평판(reputation)’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것은 출퇴근 시간이나 근무 태도의 관리보다 훨씬 정확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우리 사회도 각 분야에서 ‘성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기업과 같은 민간부문과 달리 공공부문의 성과는 실체가 무엇인지,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이 겪게 된다. 목표 가치보다 수단 가치에 중점을 두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계량지표만 따지다 더 중요한 성과 목표를 놓치기도 한다. 때로는 밖으로 내건 목표와 실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도 하다.

세계은행에서 회원국의 재정개혁에 대한 자문 업무를 하면서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새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한 재정 분야 전문가팀 미팅에서 질문을 던졌다. ‘재정개혁이 성공했다는 증거가 무엇이 돼야 할까’였다. 팀원들에게 각자 메모지에 답을 간단히 써서 비교해 보자고 했다. 문득 삼국지에서 조조(曺操)와 적벽대전을 앞둔 공명(孔明)과 주유(周瑜)가 각자의 계책을 손바닥에 써서 비교하는데 둘 다 함께 ‘화(火)’자를 써서 화공(火攻)으로 위(魏)나라 군을 섬멸할 것에 의견을 같이하는 대목이 생각나서였다. 어떤 견해들이 나올까 적나라하게 보고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원이 같은 답을 썼다. 공직자의 ‘의식과 행태의 변화’였다. 이것이야말로 개혁이 성공했다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최근 많은 국정과제를 추진하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국정과제를 통해 진짜 거두려는 성과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 대부분 과제들이 ‘정상 추진’으로 나오는 진도 점검의 결과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런 것들은 과정 관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책의 최종 목표보다 수단에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분명했다. 수단적 가치는 ‘그만하면 내 할 일 했다’는 면피성 지표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직업훈련이나 사회보험료 지원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늘었나 따지기보다 이런 사업들을 통해 일자리를 얻는 사람이 얼마나 늘었나가 성과가 되어야 한다. 자칫하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우(愚)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공직자에게 문제를 내는 출제자는 국민이다. 출제자는 ‘어려운 숙제’를 냈는데 공직자들이 ‘쉬운 숙제’로 바꿔 풀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정과제를 포함한 대부분 정부 정책의 성과는 ‘국민 삶의 실질적인 변화’다. 이런 변화들이 ‘어려운 숙제’의 답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공직자의 의식과 행태의 변화가 선행될 때 제대로 찾을 수 있다.

현장 확인과 정책고객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성심(誠心)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출제된 의도에 맞는 답이 무엇인지 늘 마음속 손바닥에 써보는 것이 그런 변화의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김동연 국무조정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과 예산실장,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을 지냈다. 상고 졸업 후 은행과 야간대학을 다니며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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