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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속으로] '한국 자유·독립조항' 루스벨트가 주연 … '장제스 역할론' 은 과장된 신화다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은 세계사의 이정표(里程標)다. 20세기 한국사 전개의 극적 전환점이다. 회담은 70년 전(1943년 11월 22~26일)에 열렸다. 회담은 이렇게 기억된다.

 “카이로 회담에서 식민지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 정상들이 처음 논의했다.”-이 대목은 역사적 사실이다.

 “선언문에 한국 독립 문구가 들어간 것은 중국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역할 덕분이다.” 이것은 대다수 한국인의 상식이다. 진실과 어긋나는 과장이다. 카이로 무대에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중국 총통(總統) 장제스가 출연했다. 그 시대 국제정치의 삼 거두(巨頭)다.

 선언문은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별도로 결의한다. 전 세계 수십 개 식민지 중 유일하다. 그 전까지 한국은 ‘잊혀진 나라’였다. 행운의 역사 드라마다. 한국 문제의 연출과 주연은 루스벨트다. 장제스는 조연이었다.
 
메나 하우스 호텔 정원 뒤 피라미드. 70년 전 뉴욕타임스의 카이로 회담 기사를 읽는 필자.
 11월 말은 회담 개최 70주년이다. 70년 세월은 기자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나는 회담 현장을 추적하고 실체를 해부했다. 한국 독립을 논의한 루스벨트 숙소를 찾아냈다. 언론 사상 처음이다. 숙소는 반세기 이상 베일에 가려 있었다.

이 집트 수도 카이로는 장구한 서사시다. 그 서사(敍事) 속에 카이로 회담 장소가 남아 있다. 메나 하우스(Mena House) 호텔, 루스벨트 숙소-. 메나 하우스 호텔은 회담 본부였다. 주요 회담은 근처 루스벨트 숙소에서 진행됐다. 호텔은 카이로 외곽의 기자(Giza) 피라미드 관광지에 있다.

 지난달 나는 호텔을 찾았다. 호텔 앞 피라미드로 가는 길에 장갑차 두 대가 서 있다. 축출된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 옹호 시위가 틈틈이 계속된다. 장갑차 임무는 관광지 경비. 정국 불안으로 피라미드 주변은 한적했다.

 종업원이 회담의 유산으로 나를 안내한다. 고대 이집트 왕국의 문양, 파라오풍을 덧칠한 샹들리에와 장식, 130년쯤 된 호텔은 화려함을 과시한다.
 
 처칠 스위트(632호)-. 처칠이 회담 때 쓰던 방이다. 그것을 기념했다. 처칠 룸 앞의 복도 벽과 방에 액자가 걸려 있다. 역사 앨범에 등장하는 회담 사진들이다.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와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다. 처칠 룸 창문 밖은 숨막히는 장관이다. 쿠푸왕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코앞에 놓인다. 사진과 피라미드는 타임머신이다. 나는 70년 전 이집트로 진입했다.

1943년 늦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는 연합국 승세로 굳어졌다. 추축(樞軸)국은 헝클어졌다. 이탈리아는 항복했다. 무솔리니는 패주했다. 히틀러의 독일은 소련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는 뚜렷해졌다.

 루스벨트는 연합국의 정상들을 모았다. 전략 합의가 필요했다. 독일·일본과의 전쟁 마무리(군사), 전쟁 후 세계의 신질서를 짜는(외교) 문제였다. 11월 말에 두 개의 회담이 연이어 소집됐다. 카이로(이집트)→테헤란(이란) 회담이다.

 11월 22일 월요일 오전 9시35분 루스벨트는 카이로에 들어갔다. 대서양→지중해를 거친 12일 여정의 끝이었다. 장제스와 처칠은 전날 도착했다. 섹스턴트(Sextant, 6분의 1)-. 회담 코드 네임이다. 독일 공군의 기습에 대비했다. 메나하우스 일대는 대공포, 경호 경비로 삼엄했다. 회담장은 3개국 100여 명의 군 수뇌부, 외교관, 수행원들로 북적거렸다.

 회담장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세 사람의 입장은 엇갈렸다. 의제는 일본 문제에 맞춰졌다. 처칠은 불만이었다. 그는 루스벨트의 장제스 대접도 과도하다고 싫어했다. 중일전쟁(1937년) 개전 이래 장제스 정부는 거듭 패퇴했다. 내륙의 충칭(重慶·임시수도)으로 밀려났다. 회담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 중국 영토 회복, 국민당 군대 지원 문제에 집중됐다. 버마 상륙작전도 대립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의 갈등 한복판은 식민지였다. 루스벨트는 국제질서 재편의 바탕을 식민지 해체에 맞췄다. 처칠 입장은 대영제국 부활, 식민지 유지였다.
 
한국 독립 문제는 의외의 만남에서 논의됐다. 도착 다음 날인 23일 저녁, 루스벨트는 숙소로 장제스 부부를 초청했다. 숙소는 메나하우스 호텔에서 10㎞쯤 떨어졌다. 나는 빌라를 찾아나섰다. 처칠은 초대받지 않았다.

 홉킨스 보좌관이 배석했다. 루스벨트의 아들 무관 엘리엇(Elliottt·당시 33세·중령)이 만찬에 합류했다. 쑹메이링은 통역이었다. 총통의 고문 외교관이기도 했다. 회담은 세 시간(오후 8~11시)가량 진행됐다.

 루스벨트는 일본 패전 뒤 중국의 영토 회복을 약속했다. 중국은 청일전쟁(1894~95년)이래 일본에 빼앗긴 영토(만주, 대만, 팽호도)를 돌려받기로 했다. 루스벨트는 중국에 세계 경찰국가의 지위를 준다고 했다. 미국·영국·소련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줬다. 카이로의 최대 수혜자는 장제스로 기록된다.

 루스벨트-장제스 만남에서 한국은 부수적으로 거론됐다. 누가 한국 독립 문제를 주도했을까. 그 대화에 대한 미국의 공식 기록은 없다. 비공식 만찬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장제스는 정리해 두었다.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1956년 미국 국무부에 그 내용(영어 번역)을 보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공산당에 패배했다. 대만으로 밀려난다.

 대만 자료에 한국 관련 부분이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인도차이나, 다른 식민지역의 장래 지위에 대한 상호 이해를 같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장제스 총통은 동의하면서 한국에 독립을 허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蔣謂朝鮮應豫獨立).” 중국 기록도 “한국 독립문제에 대하여 총통은 특별한 노력을 경주했고 루스벨트에게 우리 주장을 찬조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강조한다(張其<5441>, 開羅會談紀實).

그 기록들은 진실인가, 과장인가, 일부만 사실인가-. 카이로 회담의 미국 국무부 기록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은 1960년대부터 비밀이 해제되었다. 나는 두 나라 기록을 비교했다. 상당한 차이가 난다.

 FRUS의 11월 24일 기록은 충격적이다. 루스벨트는 24일 오전 11시 빌라에서 처칠과 만난다. 그리고 전날 밤 장제스와의 요담 내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총통(장제스)은 전날 있었던 토의 내용에 대해 매우 만족한 듯하다. 중국이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야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There was no doubt that China had wide aspirations which included the re-occupation of Manchuria and Korea).”

 한국 재점령에 대한 광범위한 야심-. 그것은 치명적인 의문을 던진다. "장제스가 한국독립조항을 이끌었다”는 믿음과 상식을 무너뜨린다. 그것은 김구의 임정(臨政)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야심은 청일전쟁 이전 질서로의 복귀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중국은 수천 년 한반도를 속령(屬領)으로 취급했다.

 엘리엇의 증언은 결정적이다. “대통령이 한국을 포함해 일본 점령 지역에 대한 전후 배치에 대해 물었다. 장제스는 한국 운명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엘리엇 회고록, As He Saw It, 1974년).

 미국 연구서들은 거의 장제스 역할을 평가절하한다. 카이로 회담의 최고 전문가는 하이퍼만(Ronald I. Heiferman·퀴닉피악 대학 아시아연구소장) 교수다. 그의 2011년 저서(The Cairo Conference of 1943)는 이렇게 분석한다.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전후 운명에 대한 언급이 포함된 것은 부가물(addendum)이다. 삼인 회담에서 별달리 자세히 거론되지 않았다. 다만 루스벨트와 장제스의 사적 대화에서 논의되었다. 처칠은 한국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장제스는 당연히 처칠보다 관심이 많았어야 한다. 하지만 이웃나라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더 많이 표명하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판단, 엘리엇의 증언, 하이퍼만의 분석은 설득과 파괴력이 있다. 하이퍼만은 장제스 행태를 위선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장제스 정부는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그는 윤봉길 의거를 찬탄했다. 하지만 후원은 제한적이고 흔쾌히 하지 않았다. 국민당은 임정 내부의 분열상을 과장했다.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공식 망명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일본 패전 때까지 주석 김구의 염원을 끝내 외면했다. 이에 대해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불만과 한탄을 했다.

 고스(Clarence E. Gauss) 중국 주재 미국 대사의 이런 비밀 전문이 있다(FRUS 1942.2.12.). “나(고스 대사)는 임시정부 외교부장의 요청으로 비공식적으로 그를 만났다. 중국 정부가 왜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느냐고 그(조소앙)에게 물었다. 그는 귀엣말로 말했다. 일본 패전 후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宗主權·Suzerainty) 아래 두려는 중국의 욕망(desire)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종주권 욕망과 광범위한 야심-. 그것은 같은 맥락이다.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장제스의 우선 관심은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 복귀였다. 장제스의 한국 독립 거론은 원론적, 표면적이었다. 한국 독립 조항은 루스벨트가 오랫동안 구상한 일반 원칙과 전략의 실천이다.”

 나는 루스벨트 빌라를 살폈다. 파라오 미라 그림도 있다. 빌라 어디에 회담 사연이 미라로 남겨져 있지 않을까. 역사에서 사라진 건물이다. 그 사연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우울했다. 결론은 내려야 했다. “장제스는 동북아에서 중화대국의 부활에 초점을 맞췄다. 그 틀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거론했을 것이다. 한국 독립 보장을 주도했다는 장제스 역할론의 대만기록은 일방적이다. 심한 과장이다. 역할론 신화의 오랜 수명은 끝났다.”

11월 26일 4박5일의 카이로 회담이 끝났다. 세 정상은 제국 일본의 해체와 식민지 해방 문제를 정리했다. 장제스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27일 테헤란으로 갔다. 소련 원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을 만났다. 스탈린은 카이로 회담 내용에 동의한다. 12월 1일 카이로 선언이 발표된다. 한국 독립 보장은 삼국 정상의 결의다. “앞의 세 강대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념하고,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은 자유롭고 독립할 것임을 결의한다(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나는 메나 하우스 호텔로 돌아갔다. 화려한 회의장은 지금도 사용된다. 호텔 정원을 걸었다. 70년 전 뉴욕타임스(1943년 12월 2일자) 기사를 꺼냈다. 1면 전체에 카이로 선언이 소개됐다. 통단의 세 줄 제목(일본격퇴설계)이다.

한국 문제는 별도 제목 ‘PLEDGE FREE KOREA(자유 한국을 공약)’이다.

식민지 조선은 보도 통제됐다. 해외 거주, 망명 한국인들은 카이로 선언을 알았다. 그때까지 조국의 해방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의 감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생소함, 충격, 감동이 전율 속에서 엮어졌을 것이다.

삼 거두의 한국 독립 결의는 한계를 가졌다. ‘인 듀 코스(in due course, 적당한 절차)’ 때문이다. 그 구절은 실망과 저항을 낳았다. 회담 직후 충칭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미 대사관을 찾았다. 해명을 요구했다. “전후 한국이 중국의 위임 통치(mandate)를 받을 수 있다는 루머가 중국 신문에 실리면서 한국인들을 혼란시키고 있다. 한국인들은 카이로 선언 축하 모임을 취소했다”(FRUS 1943.12.7). 한국인들은 중국의 신탁통치를 먼저 의심했다.

루스벨트의 한국 관심은 언제부터인가. 태평양 전쟁 70여 일 뒤(1942년 2월 23일) 그는 한국을 처음 언급했다. 라디오 연설문(워싱턴 생일기념)에서 “한국 국민이 당하는 일본의 가혹한 압제”에 동정을 표시했다. 그는 식민지 한국의 처리 문제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승만 독립 외교는 활기를 띤다. 1941년 6월 그는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냈다. 그 책은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측했다. 미국 오피니언 그룹에서 주목했다. 이승만은 미 국무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국무부는 이승만을 외면한다.

카이로 회담은 루스벨트 뉴딜의 국제판이다. 뉴딜은 개혁과 공동 번영이다. 그리고 대서양 헌장(1941년 8월 처칠과의 공동선언) 정신의 반영이다. 그 핵심 정신은 강탈된 주권과 자치의 회복이다.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루스벨트의 불신은 깊었다. 뉴딜의 세계 신질서 구축 수단은 식민지 해체였다. 그는 속도를 조절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인도·버마는 건드리지 않았다. 일본의 점령지 중국, 식민지 한국에 초점을 맞췄다.

 신탁통치는 식민지 퇴출의 루스벨트 방식이다. 여기에 완전 독립으로 가는 중간에 후견(後見·tutelage)체제를 둔다는 것이다. 그의 신탁통치 구상은 배타적 독점의 견제 목적도 있다. 김학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루스벨트는 한반도에 대한 중국·소련 등 열강의 상충하는 야심을 중화시키기 위한 국제관리 방식이 긴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분석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독립 열정과 전략은 감동적이고 치열했다. 1943년 7월 김구는 장제스를 면담했다. 장제스는 한국 독립의 관철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그해 5월 이승만은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본 팽창주의를 저지할 민족은 한국뿐”이라고 역설했다. 장제스는 김구의 염원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이승만 염원에 대해 루스벨트는 제대로 반응을 표출하지 않았다. 국제정치는 강대국의 국익 경연무대다.

처칠과 루스벨트는 스핑크스를 찾았다. “해 질 무렵 스핑크스는 아무 말 없이 신비스러운 미소를 띨 뿐이다”(처칠 회고록). 나는 피라미드 앞 스핑크스를 살폈다. 수천 년 기묘한 미소는 한결같다. 카이로 선언은 그렇게 살아 숨쉰다.

 2013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은 커진다. 중국은 영유권의 근거로 카이로 선언을 든다. 일본은 청일전쟁 전부터 센카쿠 열도가 자기 영토였다고 반박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70년 전보다 높다. 장제스의 중화(中華)대국 열망은 승계된다. 21세기 공산 중국의 후손 지도자들이 실천하고 있다. 군사력 강화의 일본 야심은 재생된다. 부국강병, 리더십의 역사적 상상력과 전략, 국민적 지혜와 각성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카이로(이집트)=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사진설명

1
카이로 회담의 삼 거두(1943년 11월 25일 낮 메나 빌라).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영국 총리 처칠.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은 치마에 옆 트임을 주는 중국 전통의상을 입었다. 뒷줄은 중국(商震, 林 ), 미국(Somervell, Stilwell, Arnold), 영국(Dill, Mountbatten, Wiart)의 군 수뇌부(왼쪽부터). 세 나라 군 지휘부가 카이로에 대거 출동했다. 흰색 양복·구두에 시가를 문 처칠은 장제스를 못마땅해 했다.

2 회담 본부였던 메나하우스 호텔(1886년 개관). 카이로 서쪽 외곽 기자 피라미드 지구에 있다. 고풍스러운 호텔과 카나리아 야자수 뒤로 4800년 된 거대한 쿠푸왕 피라미드가 솟아 있다.

3 처칠 숙박을 기념한 호텔의 ‘처칠 스위트’ 앞 복도.

4 복도 벽에 붙은 카이로 회담 기념 사진들.

5 카이로 선언을 다룬 70년 전 뉴욕타임스 1면. 한국 독립은 별도 작은 제목(PLEDGE FREE KOREA 자유 한국 공약).

6 루스벨트가 묵었던 메나 빌라 정원의 지금 전경. 회담의 역사적인 기념사진은 보안상 이 정원에서 찍었다.

7~8 2013년 10월 말 호텔 앞 이집트군 장갑차. 정국 불안 속에 관광지 경호 임무다. 마차와 낙타는 피라미드 관광 명물(10번 사진). 70년 전 회담 종료 뒤 카이로 유적 관광에 나선 장제스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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