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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적의 춘계공세(5)

전회에 이어 국군 제5사단과 그 우측에 인접한 제7사단의 전투상황을 살펴보겠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중공군은 춘계공세 때 중부와 중동부에 주공을 두었기 때문에 이 방면에 배치됐던 국군은 한때 몹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국군 제5, 제7의 두 사단은 미제2, 미제7, 미제1해병사단으로 편성된 미제10군단에 소속된 부대로서 주로 인제·관대리·양구 등 지역에서 싸웠다.
<중공군 포로 하루 수백명씩>
▲김익렬씨(당시 제5사단부사단장=대령·예비역육군중장·전국방대학원장·52) <5월l6일에 중공군은 우리 주 저항선을 돌파하여 홍천의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대공세를 취해왔어요. 이날 적은 36연대 정면을 뚫고 들어와 35연대와 27연대를 완전히 포위했어요. 통신망도 모두 두절돼 할 수 없이 각 대대별로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도록 했읍니다. 대부분이 탈출에 성공했는데 35연대의 3대대가 못나왔어요.
서곡리에 집결한 각 부대는 3대대를 구출코자 반격을 했지만 적대 부대에 밀려 실패했어요. 그러나 이튿날 3대대는 용케도 빠져 나와 부대를 장수원으로 이동, 정비하다가 이번에는 제1, 제2대대가 적에 포위됐어요. 그러나 먼저 포위에서 빠져 나온 3대대의 엄호로 1, 2대대가 구출됐어요. 5월19일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는데 이날 우리 5사단은 적의 인해 공격으로 많은 장비와 병력손실을 입었읍니다. 도저히 더 이상 전투를 계속 할 수가 없어 미군 제2사단 2연대에 진지를 인계해 주고 장평리에 후퇴, 부대를 재정비했지요.
이때 우리 사단병력은 겨우 6천여명 밖에 안됐어요. 5월25일께부터인가 재정비를 마친 우리 사단은 「캔저스」선을 목표로 반격전에 나섰습니다. 이때는 이미 적 공세가 거의 기진해서 잔적을 소탕하면서 현리를 거쳐 인제로 올라갔어요.
중공군 프로를 많이 잡았는데 포격이 심하니까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몇백 명씩 길가에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듭디다. 모두 굶어서 사기가 말이 아니예요. 포로들을 먹이다 보니 보급 받은 식량이 부족해서 미군기로 공수해 오기도 했지요.
이 무렵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하겠어요. 이때 나는 인제 북방서 싸우고 있는 S연대에 독전으로 나갔어요.
국도에다 흰 횟가루를 뿌려 선을 그어 놓고 만약 이 선을 넘어 후퇴하면 총살한다고 엄명을 내렸어요. 지휘관이 차를 타고 넘으면 바퀴에 횟가루가 묻을 테니까 그렇게 한 거예요. 치열한 접전 끝에 중공군이 밀려들어오는데도 아군은 후퇴를 안합디다.
<연대장이 소령으로 강등도>
내가 너무 심하게 독전을 해서 모두 죽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데요. 그런데 인제에 들어가 보니까 읍내에까지 중공군이 들어와 있고, S연대장은 행방불명이예요. 전사한 줄 생각하고 몹시 가슴이 아픕디다. 사병들을 시켜 시체를 찾아보게 하고 「지프」라도 확인해 보도록 했어요. 그런데 이튿날 특무대장이 오더니 S연대장을 후방에서 만났다는 거예요. 나는 영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사단 헌병부장을 시켜 S연대장을 즉시 연행해 오도록 했어요. 알아보니까 S연대장은 국도를 피해 차를 논두렁으로 몰고 후퇴했더군요. 민기식 사단장은 그것보라면서 그 사람이 틀림없이 살아있다는 자기 말을 왜 안 믿었느냐고 핀잔을 줍디다.
그후 S연대장은 대령에서 소령으로 강등됐어요. 6월초부터는 적의 춘계공세가 완전히 좌절되고 본격적인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전개됐어요. 6월10일에 27연대가 전면의 무명고지를 점령하고 36연대는 1122고지를 맹렬히 공격해 들어갔어요. 그런데 27연대가 752고지를 공격하다가 막대한 피해를 내고 전투를 계속 할 수가 없어 예비부대로 있던 35연대와 임무를 교대시켰어요. 이때는 농무기라 미군의 항공과 포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전투하기가 더 힘들었읍니다. 6월16일에 36연대가 「캔저스」선상의 적 마지막 거점인 981고지를 공격 점령했어요. 이래서 아군은 4월23일 적 춘계공세가 시작될 때 확보했던 진지와 전선을 대체로 수복한 셈이지요.>
다음은 5사단 우측에서 싸운 제7사단 관계자들의 이야기.
<아무리 사살해도 끝장 안나>
▲김형일씨(당시 7사단장=회장·예비역육군중장·현 국회의원·신민당사무총장·48) <우리 사단은 미제10군단의 최우측 사단으로 인제 남방 관대리 부근에서 홍천으로 이르는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중공군은 여기에다 주공을 돌렸어요. 우리 7사단과 인접하여 우측에는 최석 준장의 제9사단이 관대리 사이를 맡고 있었고, 좌측에는 민기식 준장의 제5사단이 방어하고 있었지요. 내가 지휘한 제7사단이 맡은 지역은 인제에서 홍천·원주로 빠지는 길목으로 전략상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적의 2차 춘계공세가 시작될 때 7사단 정면에는 중공군 약5개 사단이 집결하여 홍천을 뚫고 원주를 공격함 계획임이 드러났어요.
적을 5월16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는데 전에 볼 수 없이 그들의 준비포격이 치열합디다. 얼마나 쏘아대는지 약3시간 적 포격을 받고 나니 3연대, 5연대, 8연대를 연결하는 모든 유선통신이 완전히 두절됐어요. 그후 피아가 뒤섞여 백병전이 전개됐는데 적은 아무리 사살해도 인해전술로 나오니까 끝이 없습디다. 중공군은 식량으로 미싯가루에다, 사병은 모두가 방망이 수류탄을 3∼4개씩 가지고 있어요. 이 전투에서 상당수의 중공군을 생포했는데 그들의 소속을 보고 5개 사단의 혼성인 것을 알았어요. 우리 사단은 적의 인해전술에 견디다 못해 정진 대령의 제3연대를 홍천 동북방의 풍암리에 저지부대로 남겨두고 8연대와 5연대를 후퇴시켰어요. 우리 사단이 후퇴한 다음 미7사단이 반격을 시작하여 적의 진격을 풍암리에서 저지했어요. 7사단은 영월북방의 마차리에서 재편하여 관대리 지역을 다시 방어했읍니다.>
한편 현직책상 익명을 요구한 7사단의 한 관계 지휘관은 그때의 전부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때 미군은 소위 「V」 작전이라 해서 이동선 작전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전방부대로 한국군을 배치하고 그 뒤에 미군을 배치하는 일동방어선을 만들어 중공군을 우리 5사단과 7사단 전면에 유인하여 압도적인 미군화력으로 섬멸하는 작전이지요. 관대리와 양구·인제 지구의 전투에서 우리국군 7사단과 5사단이 큰 손실을 입었지만 중공군도 수만 명이 미군반격으로 섬멸됐으니 결과적으로는 「V」작전은 성공한 셈이지요. 우리 연대가 관대리에 주둔할 때 사단에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있었어요. 나는 6·25 전에도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지리를 잘 알고있어 요지에 호를 파고 복개작업을 끝냈읍니다.
<적 포격에 부대간 통신 두절>
박격포는 1문당 4백발, 기관총탄은 1정당 8통씩 현지에 비축하고 연대본부에도 같은 수량만큼 탄약을 저장했어요. 적 2차 공세가 시작되기 1주일 전에 미10군단 본부에서 실시한 진지 검열에서 우리 연대는 모범부대로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5월16일 저녁에 적 기마병이 관대리 뒷산에 나타나서 정찰을 시켰더니 적정이 아주 활발해요. 한시간 후부터 적의 일제공격이 시작됩디다. 준비포격과 함께 1백여명의 적 기마병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기관총으로 거의 섬멸했어요.
우리 부대는 6백 고지로 쇄도하는 중공군과 싸우노라 정신이 없고 적 포격으로 통신이 모두 끊어져 인접부대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몰랐어요. 한참 싸우다보니 적은 우리 좌측을 뚫고 우리연대 후방인 관대리와 자은리 중간지점인 어논리에서 전투중이라는 보고가 옵디다. 얼마 지나니 자은리의 사단사령부에 보낸 보급차가 습격을 받아 병사만 겨우 돌아왔어요.
우리 우측남방인 반장리도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구요. 이때야 비로소 우리 연대만 적 포위 속에 들고 인접부대는 모두 무너지거나 후퇴한걸 알았어요. 사단본부와 연락이 안돼 쩔쩔 매고 있는데 통신참모가 차에다 통신선을 끌면서 우리부대에 들이닥쳐 처음으로 김형일 사단장과 통화가 됐어요. 사단장은 좌측 5사단도 불리하다면서 연대장 판단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합디다. 뒷이야기지만 사단장의 이 지시를 전투상보로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전투가 끝난 후 부대붕괴책임문제가 나왔을 때도 나는 무사했어요. 결국 나는 부대를 사단사령부가 있는 곳까지 빼기로 했읍니다.
<아군 부연대장 등 포로 되고>
3개 대대를 거느리고 상남리로 빠지는 길에 오니, 벌써 중공군대 부대가 남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한사람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에 한 15리나 뻗쳐 있습디다. 이 길을 건너야 저편의 아군 있는 곳으로 가는데 퇴로가 꼭 막힌 거지요. 나는 능선에서 부대를 좀 쉬게 한 다음, 중공군 항렬을 뚫기로 결심했어요. 권총을 빼들고 연락병 등 10여명과 함께 총을 쏘면서 능선을 내려가 중공군 행렬 가운데를 뚫었어요. 한사람씩 밖에 못 다니는 길이 돼서 우리가 뚫고 가는 곳의 적은 얼마 안됐어요. 이와 함께 먼저 건너간 10여명이 집중사격을 가하니까 적은 흩어지고 백「야드」 좀 길이 트입디다. 이때부터 연대주력이 건너기 시작했는데 모두다 빠지지 못한 채 적의 공격을 받아 이곳에서 약3백명이 포로가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읍니다. 이때 부연대장과 대대장 1명도 포로가 됐어요. 거기서 좀 나오니까 5사단 35연대가 후퇴해와 정비를 하고 있더군요.
여기서 꼭 이틀을 굶은 끝에 건빵을 처음 먹었어요. 이날 밤(18일)에 민가에서 밤을 새우다가 또 적의 기습을 받아 간신히 탈출했고 함께 있던 5사단의 모 장교는 문에 부딪쳐 이빨이 모두 부러지는 등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얼마쯤 더 가니 후퇴하는 아군을 수용하는 5사단 사령부가 나옵디다. 거기서 7사단에 연락이 돼 만3일만에 사단에 도착했어요. 우리 사단은 탄광이 있는 영월북방의 마차리에서 재편한 다음 다시 인제 지구로 올라갔지요.>
◆주요일지(1951년5월29일, 30, 31일)
※5월29일 ▲적, 양구 지역서 완강히 저항 ▲아군, 화천 우방에서 9km 진격.
※5월30일 ▲국군, 고성탈환 ▲미 공탁, 금화부근의 적 보급소 대폭격 ▲「리지웨이」사령관 한국전선시찰 ▲영·「이란」관계 악화
※5월31일 ▲화천 저수지 탈환 적시 1천여구 발견 ▲호지명군 맹 공세
※알림=중앙일보사의 허가나 양해 없이 본 연재기사의 전부 또는 일부를 어떤 형태로라도 전재·인용할 수 없음. 영화·TV·연극 등의 각본·여본에 이용할 경우도 마찬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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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