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말잔치로 끝난 '전통방식 복원'

숭례문 화재 3주년인 2011년 2월 10일, 처참한 화상을 입은 숭례문 현장에 한복 차림의 인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나무를 끌로 다듬고 정으로 돌을 쪼고, 기둥과 줄을 이용한 옛 거중기로 석재를 들어 올렸다. 최광식 당시 문화재청장이 이를 격려했다. 이 자리는 의미가 컸다. 본격 복구에 들어가기 앞서 전통 도구를 사용한 전통 작업방식이 첫선을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거중기 하루만 쓰고 … 다음날부터 크레인 운반작업

 문화재청은 2008년 5월 ‘숭례문 복구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중요무형문화재 등 기술자들이 참여해 전통기법과 도구를 사용해 복원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전통방식 복구는 숭례문 복원이 처음이었다. 전통 업계는 기대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현장에서 한복은 사라졌다. 거중기 대신 크레인이 돌을 들었고 삽 대신 굴착기가 흙을 파냈다. 하루만 보여준 ‘대국민쇼’였다.



 이후 복원 현장에는 ‘무늬만 전통 방식’이 속출했다. 재료의 조달·운반 같은 공사 과정 중 어디까지 전통에 따를지, 나아가 전통이 무엇인지에 대한 원칙이 안 섰기 때문이다. 성곽 쌓기 책임자인 이재순(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석장은 “전통 방식대로라면 드잡이공들이 돌을 성벽 위까지 날라야 했다”며 “그러나 시간적·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도 “인부들이 한복을 입은 것은 복구현장 공개가 있는 날뿐이었다”고 인정했다.



 목재 공사도 전통에서 비껴 나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인부들이 전통 방식으로 나무를 직접 다듬게 한다는 당초 계획과는 달리 큰 나무의 껍질을 벗기는 과정은 공장에서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응수 대목장은 “모두 손으로 했다”고 부인했다.



 숭례문 2층 마루도 전통과 현대를 오락가락했다. 신 대목장은 “장마루가 잘 안 말라 자꾸 뜨기 때문에 나사로 박았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나사는 전통이 아니니 못을 쓰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 1~2층 마루 사이가 뜬다”고 말했다.



 기와도 사정이 비슷하다. 문화재청 당국자는 “기와 제조도 전통 방식대로라면 100% 수작업을 해야 했지만 흙을 섞고 이물질을 고르는 과정에 기계가 동원됐다”고 말했다. 기와 작업을 맡은 김창대 중요무형문화제 제91호 제와장 전수조교는 “재료로 쓰인 세 종류 흙을 분쇄하고 혼합하는 일을 기계가 했고 이후는 전통을 따랐다”고 말했다. 좋게 말해 ‘전통과 현대의 혼합’, 나쁘게 말하면 ‘얼치기 전통’인 것이다.



 전문가들은 “공기를 5년으로 해놓고 전통기법을 적용하겠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라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목재전문가 C씨는 “조선시대에는 목공사가 끝난 뒤 수개월에서 수년간 나무가 자리 잡기를 기다린 후 단청을 했고 숭례문 기둥으로 쓸 목재는 건조에만 7년 이상 걸린다. 그러니 단청이 떨어지고 나무가 갈라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선 초 숭례문의 원형을 무시한 복원이란 지적도 나온다. 이칠용 한국공예예술가협회장은 “1398년 태조 7년 창건 당시 숭례문 홍예(虹霓·무지개 모양 통로)의 높이는 약 8m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완공된 홍예는 5m가 안 된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창건기의 지반까지 파면 땅 속 유구를 훼손할 수 있고 남대문 시장으로 통하는 지하도의 안전에도 문제가 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특별취재팀=안성규·이영희·이승호 기자, 사진 박종근 기자, 김종록 문화융성위원·작가·객원기자,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이수곤 서울시립대 교수,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관련기사

▶ '숭례문 부실' 중앙일보 보도 본 국회 "국가적 창피"

▶ 기둥·추녀 뒤틀려…숭례문 '엉터리 복원' 이유

▶ 아교, 50도면 녹는데…숭례문 복원에 '가짜 아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