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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에 반생 불태운 정치 5년 생|새 신민당 수 김 홍일 씨의 어제와 오늘

새로 신민당당수로 선출된 김홍일씨는 중국과 만주벌판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반생을 불태운 항일독립투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98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난 김 당수는 17세 되던 해 정주 오산중학에 입학했다.
당시 교주인 남강 이승훈 선생과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 심어준 민족의식은 그를 항일운동에 몸바치게 한 계기가 됐다.
김 당수는 지금도 『오산학교시설 남강·고당 이라는 두 인간 산맥이 끼쳐준 심대한 감화의 영향은 내 일생을 좌우했다』고 회고한다.
재학 중 선친의 별세로 중국유학계획이 좌절된 김 당수는 남강의 권유로 황해도 신천에 있는 경신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항일학생비밀결사사건으로 피견 되어 파란의 일생이 시작됐다.
가석방중 고당의 권유로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했다. 당시 독립군은 장비도 부족했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휘장교도 없는 비 조직화한 실정이어서 김씨는 군 경력도 없이 중대장을 맡았다. ·
일제의 소탕작전에 밀려 「시베리아」로 피신했다가 상해로 건너가 구 국회 대표인 황개 씨의 주선으로 왕웅으로 이름을 고쳐 귀주육사를 졸업, 장개석의 북벌 군에 참가했다.
국민 군에서 그가 남긴 것은 교육을 받은 청년들만으로 근대장비를 갖춰 국민군중의 최정예 부대로 이름을 떨쳤던 16군의 창설이다. 이 부대의 부 참모장이던 그는 이 우대의 성장과 전과로 유명해져 장총통과 군부의 신뢰를 받아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장성으로 진급, 현역으로 장 총통 참모 등 요직을 지냈고 광복군과 국민 군으로 자유롭게 직책을 옮길 수 있었다.
김씨는 이 무렵 김구, 여운형, 장덕수, 노백린, 이동휘, 유동열, 신규식 씨 등 독립투사들과 교우를 두터이 했다. 또한 중국 군 재직을 계기로 장개석 현 총통과 장군 비서 장 등과 교분을 쌓으면서 상해사변·청도 전투 등에 참가하기도 했다.
김씨는 김구 등 임정요인들과 협의한 결과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임정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중일관계를 격화시킬 사건을 꾸미기도 하고 폭발물을 마련하는 책임을 맡았다.
당시 이봉창 의사의 앵전문일황 저격사건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폭파사건 등에 쓰여진 수류탄은 모두 김씨가 제작, 마련한 것. 이 사건으로 안창호씨가 체포되는 등 검거 바람이 불자 왕일서로 다시 이름을 바꿔야했다.
34년 광복군이 재조직되고 항일전이 본격화하자 정규군 교육을 받은 사단장 급 지휘관이 없던 광복군에 참가해달라는 김구선생의 권유를 받아 광복군 참모장을 맡아 일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47년까지 중국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있다가 중국 군 중장으로 예편, 귀국한 그는 48년 초대육사교장으로 취임, 국군정비에 노력했다. 국방군 소장으로 임관된 김씨는 임정계라 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견제 받아 일선지휘관도 맡지 못하다가 625사변이 터지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방어 작전을 맡았다.
그후 국군의 규모가 커져 제1군단이 창설되자 초대군단장으로 있으면서 포항작전을 지휘했다.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임정계 군인이 완전 도태될 때 육군중장으로 예편됐다.
김 장군의 예편소식이 전해지자 그와 깊은 교분이 있는 자유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대통령에게 특예, 주중대사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51년부터 9년간 주중대사를 맡았던 김씨는 주중외교사절단장을 지내면서 장 총통 등 자유중국정부요인들과 교분을 더욱 두터이 했다.
60년 귀국, 61년5·16후 군정외무장관으로 임명됐으나 군사혁명정부가 민정이양을 늦추자 물러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당수는 66년 한일협정반대와 관련한 「조국수해국민협의회」를 결성, 대표로 있으면서 예비역장성 30여명과 함께 「국민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군사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급성맹장염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는 위험을 겪어 병보역 됐다.
김씨는 「조국수호국민협의회」와 한일협정 반대활동이 계기가 되어 67년 총선 때 야당대열에 참여, 신민당후보로 서울 마포에서 당선됐다.
이것이 그의 정치경력의 시작이지만 그의 강직하고 중도적인 행동방향은 항상 당의 원로로서 존경을 받아왔고 지난번 진산 파동 때 당수권한대행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승리했다는 생각은 없고 아주 무거운 짐을 졌구나 하는 생각뿐입니다. 』-21일 세 차례에 걸친 결선투표 끝에 제1야당의 당수로 추대된 김홍일씨의 말이다.
김 당수는 앞으로의 당 운영·국회운영과 대여투쟁문제 등 모든 문제를 『상호협력의 자세로 인화와 단결을 이루는 방향으로 처리하겠다』고 했다. 『김 장군』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 부인 민경란(57) 여사 그리고 슬하엔 아들3형제를 두고있다.
김 당수는 우리 나라 최고훈장인 건국공로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 그리고 중국최고훈장인 운위대원장 등 12개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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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