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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제4야전군의 출현(상)|중공군 개입(2)|3천 여의 증인,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 북평 정권은 두 단계로 나뉘어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첫 단계는 유엔군이 10월24일 청천강에서 총 추격을 전개 할 때이고 두 번째이며 최종적인 개입은 이로부터 꼭 한달 후인 11월24일에 맥아더 원수가 소위 「종전작전」이라고 부른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될 때 단행되었다.
예비적 개입이라고 볼수 있는 첫 단계에서는 임표의 제4야전군 l2만 명이 전선에 출현하였다. 이 중공군은 주로 중 서부전선에서 국경부근까지 북진한 한국군 제2군단 (제6, 7, 8사)과 미 제1군단 소속의 한국군 제1사단, 그리고 이를 지원한 미제1기병 사단8연대를 강타하여 청천강변선 까지 후퇴시키는 한편 함흥북방 고토리까지 진격한 미10군단 휘하의 한국군 제3사단26연대를 탐색하고는 더 이상 남하치 않았다. 그래서 동북의 미10군단은 중공군의 예비적 개입 후에도 예정대로 북진을 계속하여 미7사단은 11월24일에 한만 국경의 혜산진에 그리고 미 제1해병 사단은 장진호에 각각 도착했고 한국군 수도사단의 청진을 향한 진격도 순조로 왔다.
<부분적 개입이라 오판도>
워싱턴이나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이 운산과 온정리에서 한국군에 일격을 가한 후 잠잠하므로 중공 개입에 대해 구구한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래의 기성판단에 사로잡혀 전면 아닌 부분적인 개입이라는 생각으로 기울어졌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새로 나타난 적은 중공군 출신 조선 의용군 증원부대일 거라고 개입조차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점은 나중에 다루겠지만 11월24일의 유엔군 종전공세가 시작되자마자 전혀 오판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제4야전군에 이어 11월 중순까지 제3야전군도 북한에 들어와 총30만 대군으로 유엔군의 종전공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지휘계통도 만주 봉천(현 심양)에 중공·북괴군 통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는 제l야전군 사령관인 팽덕회가 취임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전회에 이어 중공군의 1차 예비개입을 노출시킨 전투 상황과 그 개입을 확인한 포로신문 등을 살펴보겠다.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그 밖의 기록을 보면 앞서도 지적한 것처럼 맥아더 사령부가 초기단계에서는 중공군 개입을 믿지 않거나 믿더라도 이를 과소평가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최영철씨 (당시 6사단2연대 헌병대장·소령·예비역 육군대령·현 용인제재소사장·48) 『묘향산까지 진격하여 그 유명한 동룡창에 들어가 보니까 적이 후퇴하면서 내려가는 계단을 모두 폭파했어요.
<새끼줄 전법에 포로 되고>
로프를 타고 겨우 내려가 보니까 l20㎜ 박격 포탄을 제조하다가 산적해놓고 도망쳤어요. 그리고 김일성 이가 평양서 좇기다가 잠시 이 굴속에서 유했다는 정보도 얻었어요. 포탄은 모두 폭파시켜 버리고 떠났어요. 김동오(고)사단장은 동룡굴 못 미처 에서 터널 속에 숨겨두고 도망친 적 보급차에 올라갔다가 부상해서 후송됐어요. 얼마동안 송석하 부사단장이 직무대행을 하다가 장도영 (당시 이름은 도영) 준장이 부임해 왔어요. 우리부대는 온정리 서북방 북진에서 중공군과 처음으로 부닥쳤습니다.
개울 능선에 잠복했던 중공군의 소위 새끼줄 전법에 걸려 우리 2연대는 거의가 다 포로가 되고 말았어요. 기습을 받으며 포위를 당하니까 아군은 차 밑에 숨고 중공군은 차 위에 올라와 보급품을 노략질하는 상태였어요.
나 자신도 여기서 무장한채 적에 포로가 됐어요.
하도 수가 많으니까 적은 우리의 무장도 해제할 사이 없이 그냥 끌고 갑디다.
호송 행군도중 나는 넋을 잃고 따르다가 길모퉁이에서 낙오 돼 혼자 남게 됐어요. 이때가 10월26일예요. 나는 혼자 헤매다가 중공군 후방초소에 들어가 경비병 한 놈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살살 기어가 중국말로 소리를 지르니까 벌벌 떱디다. 나는 마음놓고 앉으라 해놓고 양담배를 권했어요. 지금 중국에는 장개석군이 남경과 상해에 상륙해서 본토를 탈환중이라 얘기하고 나도 장개석군인데 너희들을 구하러 왔다고 했어요.
나는 일제 때 학병으로 끌려나갔다가 탈출, 중국 군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말은 꽤 할 줄 알아요.
이 경비병은 이지라는 34세의 중공군 상등병입디다. 이지는 강제로 끌려 나왔다고 하면서 고향에 부모 처자가 있다고 해요. 설득을 해서 함께 고향으로 가자고 떠났어요. 이 자는 나를 고급장교로 믿었어요. 이때까지도 나는 권총을 찬 채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는데 「라디오」를 보고 아주 신기하게 여겨요. 장총을 멘 그는 앞서고 나는 뒤따르며 2일간을 밤낮 없이 걸었어요.
<상금 40반원과 표창장 받아>
용케도 중공군 진지를 뚫고 나와 태평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예비연대였던 19연대가 들어와 있습디다. 그런데 마침 사단장 직무대리인 송석하 대령이 우리 함병선 연대장에게 작명위반과 중공군과의 접전진부를 가지고 엄중히 문책을 하고 있어요. 함병선 연대장은 중공군 기습으로 연대가 부서졌다고 해도 송석하 대령은 믿지를 않아요. 중공군이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이때 바로 내가 중공군포로 이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일은 무사히 됐어요.
나는 이지를 송 대령에게 인계했는데 즉시 사단 정보처 에서 간단한 조사를 한다음 다시 미8군 정보참모가 직접 와서 비행기로 후송했어요. 후에 이지는 유엔 총회에까지 가서 중공군이 의용군만 뽑아서 개입한게 아니고 강제 모병도 해서 파병했다는 것을 증언했어요. 나는 이지를 생포한 공으로 사단장 강도영 준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상금도 40만원을 받았습니다.
표창장에는 내가 잡은 게 최초의 중공군 포로라고 씌어있는데 나중에 물으니까 1사단과 3사단에서도 자기들이 제일 먼저 잡았다고 주장해서 이 점은 잘 모르겠어요.』
함병선씨(당시6사단2연대장=대령·예비역육군중장·현 한국해외개발공사사장·51) 『구장에까지 북진했을 때 2사단장으로 가라는 발령이 났어요. 그러나 나는 6·25발발 때부터 이때까지 함께 싸운 역전의 2연대와 압록강까지는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계속 진격해 올라갔어요. 개천 못 미쳐 신흥동서 김일성의 전용 승용차를 노획했습니다. 이 차는 평양 숭실 전문학교에 전시했다가 이승만 대통령께 선사했는데 나중에 대통령은 다시 「워커」사령관 미망인에게 주었어요.
<중공군 신발 보여도 안 믿어>
10월 하순에 온정리에 들어가 낮12시께에 적 진지를 덮쳤습니다. 점심을 먹던 적은 그냥 도망가고 무선유선전화도 그대로 통화가 계속 되고 있었어요. 마침 평안도 태생의 제3대대장 송대후 소령이 수화기를 들고 이북사투리로 위장 통화를 했어요. 그 결과 놀랍게도 운산 서북방인 북진에 중공군 지휘본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이 사실을 즉시 사단본부에 무전으로 보고했어요. 그런데 김동오 사단장의 부상으로 직무대행을 하는 송석하 대령은 이 정보를 믿으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는 우리 2연대는 초산을 향해 진격하라는 작명을 주어요. 나는 초산보다는 북진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3대대를 비롯한 주력부대는 북진 쪽으로 진격케 하고 초산에는 수색대만 보냈어요. 결과적으로는 사단 작명을 위반한 셈이지요. 온정리와 북진사이에서 중공군 신발 두 켤레를 주웠어요. 이번에는 이것을 가지고 사단에 가서 중공군 개입을 역설했으나 미 고문이나 송석하 대령은 여전히 믿지 않아요.
그런데 북진전방에서 진격하던 우리·연대가 중공군에 완전 포위 돼 거의 다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했어요. 태천 고개를 넘다가 손자병법에 나오는 소위 「새끼줄 전법」에 걸렸어요. 희천으로 해서 간신히 탈출했어요. 나는 이때 무패의 우리연대 전통을 생각해서 잔존병력으로라도 끝까지 싸우려고 했지만 김봉철 부연대장 등 참모들이 강제로 지프에 태워 후퇴를 했습니다.
<중공군 포로보고 개입 인정>
사단본부에서 송석하 부사단장한테 작명위반과 패전의 책임을 추궁 받았어요. 송 대령은 나를 총살한다 고까지 극언하며 날카롭게 책임을 추궁합디다. 마침 이때 헌병대장 최영철 소령이 중공군 한 명을 생포해 가지고 와서 우리 연대가 중공군 대부대 기습으로 분산됐다는 것이 증명돼 일이 무사히 됐어요. 미 고문과 송 대령도 중공군포로를 직접 보고서야 나에 대한 모든 오해를 풀더군요. 그리고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도 인정하구요.
내 연대로 돌아가서 구장을 향해 빠져 나오는데 적이 우리 퇴로를 끊으려고 유조차를 길 한 복판에 세워놓았어요. 나는 차에서 뛰어내려 소각시키려고 불을 그어댔어요. 순간 휘발유가 폭발하며 얼굴에 중화상을 입었어요. 지금생각해도 무모했지요.
구장으로 빠져 나와 김봉철 부 연대장에게 연대를 인계해 주었는데 이때 연대병력이 불과 1개 대대밖에 안 남았어요. 초전부터 그렇게도 용감하게 잘 싸운 우리 2연대가 중공군과의 첫 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받은 거지요. 나는 2주일간 얼굴의 화상을 치료한 다음 2사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주요일지 (1950년10월28, 29, 30일) ※28일=▲국군 성진에 돌입 ▲이천에 적천 잔병2천 명 침입. 국군야전병원의 전 환자학살 ▲소의 「비신스키」, 유엔 정위에서 한국전에 일본 군 사용했다고 비난 ▲「맥」사, 중공군 개입 설은 재만 한국인이 중공군 훈련받고 나온 것 같다고 언명 ▲미 국방성, 한국전에 일본인 사용 안 했다고 발표 ▲미 상무성, 중공에 석유출하 중지령
※29일=▲미7사단, 이원에 상육 ▲국군6사단7연대 초산서 철수 ▲육본, 온정리 공격의 적은 중공군이라 발표 ▲영호주군, 정주돌입 ▲미10군단대변인 중공군3명 생포하고 수명 사살했으나 대부대 개입은 아닌 것 같다고 언명 ▲국군3사단, 중공군16명 생포 ▲국군, 희천포기▲「무초」 주한 미 대사, 워싱턴 방문
※30일=미10군단 대변인, 중공군1개 연대 장진호에 출현했다고 발표 ▲국군6사단 온정리 운산서 후퇴 ▲중공비, 희천 침입 ▲호군 부대장 「고리인」중령, 정주서 전사 ▲이 대통령, 평양시민 환영대회참석 ▲ 유엔 경사 이사회, 한국 경제 부흥 계획 결의안 가결 ▲호지명군 공세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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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