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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역사도 보존해야" vs "아무 교훈도 없는 흉물"

1 서울 상암동에 복원한 일본군 장교 관사 전경. 2 전북 완주군에 있는 옛 삼례 양곡창고를 문화예술촌으로 재정비한 모습. 3 일제시대 호남평야의 농산물 수탈에 이용됐던 전북 완주군의 만경강 철교. [사진 문화재청·전북 완주군청]


25일 오전 서울 상암동 상암월드컵파크아파트 앞. 시커먼 나무로 만든 건물 두 동이 덩그러니 서 있다. 이 중 한 동에 들어서니 현관을 중심으로 방 3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건 건물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 화면을 보여주는 기기와 음료수 페트병 2개, 휴대전화 충전기 뿐이다. 또 다른 건물 한 동은 문이 잠겼다. 이곳을 홀로 지키는 마포구청 소속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구청에서 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들어가봤자 화장실과 주방 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일제 강점기 유산, 문화재 등록·복원 어디까지



 이 건물은 1930년대 중일전쟁 때 철도를 통해 물자를 공급하던 일본군 장교들의 관사다. 2005년 SH공사가 대규모 택지를 조성하다가 발견했다. 당시 문화재청이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SH공사와 문화재청은 13억원을 들여 전체 22개 동 중 2개 동을 2010년 10월 복원했다. 건물 앞엔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조성된 곳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일본군 관사 단지로는 유일하고 근대사의 고통을 증명하는 역사적 유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내용의 안내판을 세웠다. 이후 마포구청과 SH공사가 문화재 등록을 신청했으나 주민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문화재청도 등록 절차를 포기, 3년째 방치돼 왔다.



 그래선지 이날 만난 주민들은 이곳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인근 아파트에 산다는 탁양자(76)씨는 “이렇게 보기 싫은 시설은 없어졌으면 좋겠다.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을 연상시키는 것도 싫고, 아이들 교육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주민 이창렬(20·휴학생)씨도 “근처에 있는 일본인 학교를 의식해 수 억원을 들여 만든 곳이라고 들었다. 예산 낭비다. 차라리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4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은 건물 근처 돌담에 노상방뇨를 했다.





문화재청선 주민 반대에도 등록 추진



그러나 문화재청은 여전히 이곳을 문화재로 등록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드러났다. 새누리당 박성호 의원실이 최근 국정감사를 계기로 이곳에 대한 계획을 질의하자 문화재청은 “지속적으로 지자체와 협의해 일제 강점기 문화재에 대해 인식을 전환시키고 주민 설득을 통해 장기적으로 문화재로 등록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면 답변서엔 “치욕스러운 역사의 잔재물일지라도 보존해 후세들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훈을 얻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시민단체와 전문가 사이에선 의견이 갈린다. 역사복원국민운동본부 송태경 상임대표는 “일본 군인들 숙소에서 무슨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나. 흉물스럽고 부끄러운 곳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복기대(융합고고학) 인하대 연구교수는 “군 관사를 놔두면 일본의 전쟁을 기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지금처럼 관리도 되지 않고 있다면 더 빨리 철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문화재는 기념할 것과 기억할 것 두 가지가 있다”며 “그런 건물은 기념할 건 아니지만 기억으로 남겨둬 앞으로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사 복원을 맡았던 안창모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도 “일본군 관사는 침략사를 보여주는 희소한 곳이다. 이런 유산을 없애면 가장 좋아할 쪽은 침략의 주인공인 일본 측”이라며 “위해를 가했던 이들이 자신들의 침략 역사를 잊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자체에선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마포구청 문화관광과 유호선 주임은 “2012년 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때도 주민들의 반대가 완강해 중단했는데 지금 구청 차원에서 등록을 추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어 활용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이곳 외에도 일제 강점기 관련 유산 2곳의 문화재 등록을 추진 중이다. 본지가 박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문화재청의 ‘일제 강점기 수탈 관련 문화재 검토 대상 현황’에 따르면 전북 완주군의 만경강 철교(1928년 7월 건립)와 옛 삼례 양곡창고(1920년대 준공 추정)는 문화재 등록이 임박한 것으로 확인됐다.



 만경강 철교는 교폭 1.985m, 연장 475.76m로 일제의 호남평야 농산물 수탈에 이용됐다. 현재 국토교통부 소유인데, 철도관리공단이 관리 중이다. 삼례 양곡창고는 일제 강점기 산미 증산을 위한 식민지 정책의 증거물로, 완주군청이 수리해 문화예술촌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디어아트갤러리, 문화카페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두 곳을 문화재로 등록하는 데는 주민들의 반대가 거의 없다. 소관 지자체인 완주군청도 적극적이다. 문화재청은 11월까지 의견을 수렴한 뒤 이르면 12월 ‘문화재 등록 심의’에 들어갈 예정이다. 완주군청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지만 농협이 일제시대 이후에도 미곡창고로 사용해 철거 대신 문화예술촌으로 조성하는 데 대해 긍정적인 여론이 많다. 2010년부터 전문가들에게 재활용 방식을 자문해 과거사를 되새기며 현대인에게 맞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더니 학생들과 관광객이 찾아와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문화재청은 이미 일제 강점기와 관련해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등 5건을 지정문화재로, 제주 사라봉 일제동굴진지 등 49건을 등록문화재로 선정한 바 있다.<표 참조> 등록문화재는 국보·보물 같은 지정문화재보다 형성된 지 얼마 안 된 근대문화유산이 주를 이룬다.



서울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 모습. [중앙포토]
‘집토끼’ 사직단은 외면 … 우선 순위 논란



문화재청이 정하는 문화재 등록과 복원의 우선순위를 놓고도 논란이 있다. 일제 강점기 수탈 유산의 문화재 등록에는 신경 쓰면서 정작 일제에 의해 격하된 유산의 관리에는 소홀하다는 주장이다. 박성호 의원은 “문화재청은 오욕의 역사인 일본군 관사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려 하면서 정작 민족의 얼이 서린 사직단 복원엔 적극적이지 않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말이 있는데, 집토끼부터 제대로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사직단은 조선왕조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시대 왕권의 상징적 공간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1911년 순종황제로부터 강탈한 뒤 1922년 사직공원으로 격하시키고, 사직대제를 폐지해 가치가 퇴색됐다. 1962년 도시계획사업으로 사직단 대문이 당초 위치에서 14m 뒤로 이전되고, 사직단과 관련 없는 어린이도서관과 놀이터·단군성전·동사무소 등이 들어섰다. 이에 새누리당 염동열 의원 등은 사직단 복원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준비 중이다.



 전문가들도 문화재 등록·복원 기준이 모호한데다 문화재청의 예산과 권한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직단 주변을 복원하려면 문화재청이 주변 땅을 사야 하는데 예산이 부족하고 관련 지자체를 설득할 현실적인 힘이 없다”(안창모 교수)는 것이다. 상암동 일본군 관사에 13억원이 투입될 수 있었던 건 “SH공사가 인근에 일본인 학교를 유치하려 했기 때문”(마포구 주민)이란 해석이 있다.



 문화재청 예산(문화재보호기금 포함)은 2010년 5212억원에서 2014년 6031억원으로 증가 추세지만 선진국과 비교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문화재청 기획재정담당관실 관계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에서 문화재 관련 예산 비율은 0.24%인데 한국은 0.17%에 불과하다”며 “근대문화 예산 수요가 늘고 있는데 관련 예산은 2012년 9억원, 2013년 12억원, 내년 13억5000만원 선으로 다른 부처 예산 증가율보다 턱없이 낮다”고 말했다.



 근대문화유산 관련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엔 관리직이 대부분일 뿐 근대문화재를 복원할 전문 인력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관계자는 “근대문화유산의 등록 기준이 뭔가”라는 질문에 “그런 유산은 제대로 평가되기 전에 멸실·소실되는 경우가 많다”며 “일단 사라지는 걸 막아보자는 취지에서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문화재 지정이 정치 논리에 좌우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황평우 소장은 “이명박정부에선 6·25 관련 유산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일이 많았다”며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니 새마을운동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삼으려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문화재 지정을 정치권이 좌지우지하는 대신 전문가와 역사학자들에게 맡겨 등록할 가치, 배울 가치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근대문화재 지정과 복원에 대해선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평이다. 안창모 교수는 “근대문화유산은 개항기, 일제 강점기, 민주화 시기 등을 다루고 있어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문화재청이 전문가·시민단체와 함께 새로운 문화재 지정과 복원을 어떻게 끌고갈지 공론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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