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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년 비바람도 견뎠다 … 그림으로 쓴 이 땅의 첫 역사서

경상북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 위에는 지붕바위, 옆으론 병풍처럼 가려주는 바위까지 있어 오랜 세월 동안 빗물에 젖지 않는 신비스러움을 간직해 왔다. 그곳엔 300여 마리의 육지·해양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1965년 사연댐이 들어선 뒤 물에 잠기기를 거듭해 48년 만에 120군데 이상 훼손됐다. 조용철 기자
“반구대 암각화만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어제ㆍ오늘 그리고 내일

지난 6월 4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토로한 심정이라고 한다. 문화융성을 국정지표로 삼은 정부로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안이었다.

반구대 암각화 보존정책은 95년 국보로 지정된 이래 줄곧 표류해 왔다. 서로 합의점이 찾아지지 않자 최근에는 투명 물막이 설치안이 제기되었다. 지난 6월 16일 정홍원 국무총리 주재로 변영섭 문화재청장과 박맹우 울산광역시장이 카이네틱(투명 물막이)댐 설치를 추진하기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그 일환으로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투명 물막이댐은 계획대로 설치될 수 있을까?

지난 17일 청명한 가을 햇살을 쬐며 반구대를 찾았다. ‘태화강 백리 길’의 백미가 이곳 선사 산책길(제2구간)이다. 협착한 골짜기는 눈길 머물고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요, 신화이며 역사다.

고래와 고래잡이 묘사 작품성 최고
반구대 암각화는 수려한 대곡천과 맞닿은 거대한 수직 바위에 북향을 하고 있다. 15년 전 어느 봄날, 이곳을 처음 찾았던 때의 그 적요함과 신성함은 느낄 수 없었다. 군데군데 파헤쳐진 현장에는 포클레인과 트럭이 인부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문화재연구소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고동색 퇴적암 재질의 암각화로 다가갔다.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고래, 고래잡이 모습, 거북, 호랑이, 사슴, 샤먼 등 300여 개의 그림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다. 특히 다양한 고래와 고래잡이 묘사는 세계 최초이며 작품성도 최고라고 한다.

고래의 종류만 해도 귀신고래, 수염고래, 미늘(작살)에 찔린 고래,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돌고래, 범고래, 향고래, 새끼를 업고 있는 수염고래 등 다채롭다. 가마우지와 함께 있는 고래도 있고 고래 잡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육지 동물 가운데는 호랑이와 꽃사슴, 돼지, 거북이 있다. 나팔 부는 사람, 춤추는 샤먼도 등장한다. 암각화 중앙 상단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배’가 있는데 이는 영혼을 하늘로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해석된다.

그런데 그림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발굴 직후의 사진·탁본과 비교하니 확연히 달랐다. 착잡했다. 학자들은 “이 암각화가 그려지고 어언 6000년 동안 자연적인 풍화작용으로 훼손된 것보다 댐 건설로 인해 지난 48년간 침수와 노출의 반복으로 훨씬 더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주장한다. 2017년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앞두고 있어 그 원형성 보존이 절실하다.

암각화란 바위의 표면을 쪼아 내거나 갈아 파고 혹은 그어서 어떤 형상을 새겨놓은 것을 말한다. 한국 암각화들은 대부분 수직의 바위 면을 골라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주로 남동향이며 강가에 있다. 태양과 물이 입지 조건임을 알 수 있다. 태양과 물은 생명과 밀접하며 생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학계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지구촌에는 모두 850군데 7만여 암각화 유적이 있다고 한다. 암각화는 한 사람이 재미로 새기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식의 표현물이다. 따라서 그림이 대부분 안정감이 있고 완성도가 뛰어나다. 제작 집단의 생활양식을 표현해서 그 문화적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반구대 암각화는 이웃한 천전리 각석과 더불어 동북아 암각화 분포권에 해당한다. 태양신 숭배나 수렵과 목축의 풍요를 기원하는 문화적 맥락의 산물이다. 중국 전역과 중앙아시아, 몽골의 알타이산, 동북아시아 및 남부 시베리아에 걸쳐 분포하는 암각화군은 한반도 동쪽 반구대에서 끝난다.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열도에 암각화 유적이 보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구대 암각화는 동북아시아 암각화의 결론부라 할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그 방향이 북향이라는 점 또한 아주 특별하다. 이는 태양신 숭배, 수렵과 목축의 풍요를 기원하는 성격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북향은 고요와 죽음의 방향이다. 따라서 이곳이 종교적인 지성소(至聖所)임을 뜻한다. 지성소는 고요함과 원형성의 유지를 생명으로 한다. 이곳의 산천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중심자리다. 더 놀라운 건 비가 와도 들이치지 않아 그림이 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위벽 윗부분이 차양처럼 앞으로 돌출돼 나와 있어 기막힌 입지선정 자체가 과학적이고 세계문화유산감이다. 이곳의 장소성이 지닌 수승함이다.

“여름에 가끔 물놀이하고 겨울에는 얼음 지치러 오곤 했어요.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 오고 여럿이서 어울려서 왔어요. 저 위쪽 천전리 각석 부근에는 자주 갔지만 이곳은 터가 워낙 세고 으스스해서 잘 오지 못했죠.”

현장에서 반구대 암각화 일지를 꼼꼼히 작성해 오고 있는 손남주(50ㆍ여) 이장을 만났다. 반구대와 가장 가까운 외딴 집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자신을 암각화 지킴이라고 소개했다. 암각화 사면에 볕이 들면 그림이 선명하게 보여 장엄하다고 했다. 그의 수첩을 보니, 올해는 3월 2일 오후 5시에 처음으로 볕이 들었다가 15분 머물다 나갔다고 적혀 있었다. 5월 30일에는 3시에 들어왔다가 4시까지 머물렀다. 마지막으로 볕이 든 날은 10월 10일 무렵인데 올해는 일기가 흐려서 확인하지 못했단다. 늦가을부터 봄에는 볕이 들지 않아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민족의 기억 집적된 기억의 장소
암각화는 이곳처럼 고립된 장소, 제의(祭儀)의 공간에 그린다. 사냥을 많이 하게 해 달라,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는 기원을 담는다. “조상은 이처럼 완벽한 터를 잡아 빼어난 암각화를 남겨 줬는데 지금 후손들은 문명한 세상에서 빗물도 아니고 댐을 만들어 수장시키고 있습니다. 물길을 돌리거나 차단하는 인공물은 공간의 신성성을 깨트릴 뿐만 아니라 바위를 건조시켜 그림의 훼손을 부추깁니다. 문화재는 장소성이 생명입니다.” 국내 암각화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김호석(56) 전통문화대학교 교수의 지론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민족의 기억과 문화원형이 집적돼 살아 숨 쉬는 ‘기억의 장소’다. 집단기억이 닻을 내린 장소는 어디나 소중하다. 더구나 돌에 새겨진 기억은 우리를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게 한다. 공룡 발자국 화석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 백련구곡(白蓮九曲)의 유교문화 유산까지 함께 볼 수 있는 이곳은 ‘그림으로 쓴 이 땅 최초의 역사책’이자 ‘우리 문화의 맏형’이다. 멀리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를 관통하는 문화유산 총림(叢林)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반구대 암각화와 인연이 깊다. 암각화를 수장시킨 사연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도시 울산의 공업용수 확보를 위해 65년 건설했다. 수몰지역 문화재 발굴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71년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되고 그 가치가 인정돼 보존이 시급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의원 시절에 두 차례나 사연댐 수문설치 설계비 예산을 확보했을 만큼 반구대 암각화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여 왔다.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도 “반구대 보존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며 울산대에 반구대암각화보존연구소를 설치했다. 반구대보존대책위원회 활동도 적극 지원했다.

“지자체와 국가 공공정책이 충돌할 때 대화의 부재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자기들 주장만 하고 언론홍보로 여론을 호도해서는 답이 없어요. 그사이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훼손돼가는 것이죠. 지금부터라도 공동위원회를 만들어서 합의점을 찾아가야 합니다.”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전호태(54) 교수는 “암각화 보존과 함께 울산시의 수자원 확보 문제도 정부가 보장해야 풀린다”고 했다.

일찍이 이 땅에 찬란한 문명의 터전을 열었던 선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인류의 문화유산이 ‘물고문’당하는 모습은 끔찍하다. 지금부터라도 국가가 나서 직접 관리하고 전문가가 통합적·지속적인 근본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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