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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99대1과 1대99

지금 우리 사회가 갖는 아픔을 흔히 99대1이라는 도식으로 표시한다. 사회가 가진 축복의 99%를 1%의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안타까운 한탄이다. 이 도식이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지, 혹 과장은 아닐지. 하지만 설령 그 절반이 사실이라도 우리는 깊이 좌절하게 된다. 어떻게 사회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미국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는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문제란 말인가.

역설적인 사실은 모두 1%의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동시에 그 1%에 속하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점이다. 결국 문제의 근원은 제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웃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성경적 원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본주의는 칼뱅 같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부각됐다. 중세 가톨릭에 대항해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고, 동시에 열심히 노력해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수익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게 개혁의 취지다. 이를 위해선 검소와 베풂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자본주의 제도가 오늘날 수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제도의 문제를 넘어 마음의 문제란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그 제도를 사용하는 사람의 동기가 잘못되면 제도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정반대되는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하나를 택하고 99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99를 버리고 하나를 택하는 얘기다. 어느 목자에게 100마리의 양이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그러자 목자는 99마리를 들판에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나선다. 마침내 그 한 마리를 찾았다. 목자는 양을 둘러메고 돌아와서는 온 동네 사람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얘기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힘든 비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99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나설 수 있겠는가. 설령 그 한 마리가 아무리 사랑스러운 양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99마리를 지켜야 하지 않는가. 양이란 동물은 목자가 없으면 잠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늑대가 나타나면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얘기를 사랑하는가.

이 얘기의 핵심은 생명의 가치다. 99마리를 버려도 좋다거나, 그 한 마리의 가치가 99마리보다 더 낫다는 게 아니다. 생명의 가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다. 양 한 마리는 99마리에 비하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숫자다. 그러나 그 양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버릴 수 없다. 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埃及)의 노예로 살았을 때 그들은 생명을 잃어버리고 숫자를 얻었다. 2315번, 8831번, 3498번…. 자신의 존재도, 가치도, 존귀함도 모두 숫자로 인해 잃어버렸다. 생명이 아니라 한낱 물건이 돼버렸다. 이처럼 생명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은 생명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이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훗날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가장 야만적인 시대로 평가할 거라고 했다. 사람을 당신(you)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이용 대상인 물건(it)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효용과 합리성으로 판단할 때 숫자는 늘어날지 몰라도 생명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의 사명은 생명의 생명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한다.



박원호 장신대 교수와 미국 디트로이트 한인 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등을 지냈다. 현재 ‘건물 없는 교회’로 유명한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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