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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칼럼] 용기 있는 자가 먼저 손 내민다

“왜 한국 언론은 일본이 잘못한 것만 부각하는가. 언제까지 일본에 사과하라고만 하는가. 예전엔 일본 각료들이 할 말을 했다가도 한국이 반발하면 사과하곤 했다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지난주 도쿄에서 열린 제3차 한·일 언론인 대화. 한·일 양국의 중견 기자 20여 명이 마주 앉았다. 분위기는 차분했지만 오가는 말은 초겨울 칼바람처럼 싸늘했다. 어쩌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면서 시작한 얘기도 끝까지 들어보면 자국의 입장을 강변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았다. “얼마 전 도쿄 모처에서 소수의 극우 인사가 ‘한국을 때려잡자’고 혐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안전한 일본 수산물을 이유 없이 금수하고, 수십 년 전 다 끝난 징용 피해자 배상을 재차 요구하는 건 법치국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일관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입니다.”

국내 언론에서 지한파로 꼽혀 왔던 일본 명문대 교수의 태도 역시 달라졌다. “요즘 한국을 보면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비판으로 일관했다. 회의 뒤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일본 총리를 무조건 만나지 않겠다는 경직된 자세로 무슨 신뢰프로세스가 가능하겠느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서울특파원을 지낸 한 우파 신문의 기자는 “이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로 수립된) ‘65년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시점”이라고까지 말했다.

일부 기자는 “그래도 얼마 전 한국(일본) 신문을 보니 일본(한국)을 칭찬하는 기사가 났더라”며 대화의 물꼬를 터보려 애썼다. 그러나 독도나 과거사 문제에 이르면 넘을 수 없는 벽을 실감한 채 말문을 돌려야 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답답한 마음은 세미나가 끝난 뒤 이병기 주일 한국대사가 연 만찬에서 출구를 찾았다.

이 대사는 지난 6월 부임한 후 원전 피해에 신음하는 후쿠시마 지역을 방문한 경험담을 들려줬다. 한국산 삼계탕 1500봉지를 준비해 후쿠시마 시내 지진 피해자 숙소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뭔 일로 왔나?”라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60~80대 노인 수백 명 앞에서 말문이 막혔던 이 대사는 “여러분 중 최고령자가 누구시냐?”고 운을 뗐다. 한 노파가 “87세”라며 손을 들었다. “저를 아껴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와 똑같으시다. 꼭 제 할머니 같다”고 화답하자 그 할머니는 물론 주변 노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 대사는 이어 7월 18일 도쿄 아자부에 신축된 주일대사관 청사 개관식에 후쿠시마 노인 5명을 초청했다. 일급호텔에 재우며 개관식의 VIP로 모셨다. 노인들은 방명록에 “감격, 또 감격!”이라 써놓고 돌아갔다. 이 대사는 지난달에도 삼계탕 봉지를 들고 후쿠시마를 찾았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한·일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점에 주일대사로 부임하자니 머리가 무거웠다. 문득 일본의 아픈 곳을 찾아 사심 없이 한국의 마음을 전하는 게 대사로서 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후쿠시마에 다녀오니 일본 외무성 관리들이 ‘한국 대사가 그 곳에 왜 갔나’라며 탐문하더라. ‘아픈 이웃을 찾는데 이유가 있겠느냐’고 대답해줬다. 그들도 느끼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라.”

우리에게 독도·위안부·과거사 문제는 절대적 명제다. 그러나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을 거라면 이런 문제를 단시일 내 풀기는 불가능하다. 서로 인내하고 대화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양국이 함께할 수 있는 영역에서 정(情)을 쌓아가야 한다. 정이 쌓이면 협상의 물꼬를 트기도 쉬워지지 않을까. 그러려면 손을 먼저 내밀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 부분에서 일본보다 경쟁력이 있다. 이병기 대사의 후쿠시마 방문은 우리의 경쟁력을 입증하는 좋은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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