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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때마다 희생양 … 1200만 집시는 오늘도 짐을 싼다

집시 서커스단으로 유명한 ‘로만 서커스’의 한 여성 단원이 18일 리허설을 하고 있다. 이 서커스단은 집시의 애환을 담은 작품을 선보여 왔다. [파리 로이터=뉴스1]


유랑민족 로마(집시)는 수백 년간 유럽 전역을 떠돌며 차별받아 왔다. 이들을 보호해줄 국가가 없는 데다 가난하고 게으르다는 편견이 이들을 따라다녔다. 범죄의 온상이라는 의심도 이들을 희생자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경제위기의 한파가 몰아칠 때마다 시선은 더욱 따가워졌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쫓겨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이런 로마들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최근 유럽 전역을 들썩이게 하고 있는 소녀들 때문이다.

영국선 거주지 해산, 프랑스선 여중생 추방 … 유럽 전역이 들썩



 지난 16일(현지시간) 그리스 중부 파르살라의 로마 거주지에서 경찰에 의해 발견된 금발 소녀 ‘마리아’가 그중 한 명이다. 로마 거주지 내 마약과 불법무기 단속에 나선 경찰이 아이의 외모가 로마 부부와 전혀 닮지 않은 것을 수상히 여겨 유전자 검사를 진행한 끝에 친자가 아님을 밝혀냈다. 흐리스토스 살리스(39), 엘레프테리아 디모폴루(40) 부부는 2009년 아테네 시청에서 발급받은 출생신고서를 내보이며 마리아가 자신들의 딸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아동유괴 혐의로 체포됐다. 경찰은 이들 부부가 자식으로 등록한 아이가 모두 14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파악해 다른 아이도 유괴됐을 가능성을 수사하고 있다.



 그리스는 발칵 뒤집혔다. 영아 출생신고 시스템의 허점도 지적됐다. 이들 부부는 올해 5월까지 출생신고를 중앙정부가 아닌 지자체에서 관리해 왔던 점을 악용해 중복 출생신고를 하곤 다자녀 정부 지원금을 챙겨 왔다. 매달 정부 지원금으로만 2500유로(360만원)를 받았다.



“어린이 유괴해 앵벌이” 그리스 민심 흉흉



 마리아 문제가 파문을 일으키자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도 공조에 나섰다. 마리아 사건이 보도된 뒤 미국·캐나다·프랑스 등에서 1만 통 이상의 제보 및 문의 전화가 담당 경찰서에 걸려왔다. 수천 건은 실종된 아이를 찾고 있는 부모나 가족에게서 온 것이다. 때마침 아일랜드 경찰도 21일 수도 더블린 외곽의 로마 정착촌에서 7세가량의 금발 소녀를 발견하고 부모라고 주장하는 이들과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 중이다. 로마는 일제히 비난의 대상이 됐다. 한 아테네 시민은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로마는 아이들을 때리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도록 강요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녀는 프랑스에서 코소보로 추방된 로마 여중생 레오나르다 디브라니(15)다. 레오나르다는 지난 9일 수학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 붙잡혔다. 레오나르다 가족은 2009년 로마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며 코소보를 떠나 프랑스에 망명신청을 했다. 그러나 망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들 가족은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프랑스에서 생활해 왔다. 경찰이 수학여행 중인 학생을 붙잡아 추방한 사실이 알려지자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지난 17∼18일 파리 등 프랑스 전역에서는 고등학생 수천 명이 학교를 봉쇄하고 레오나르다를 데려오라며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가 로마 문제로 들썩인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에는 마뉘엘 발스(51) 프랑스 내무장관이 “로마의 생활 방식이 프랑스인과는 너무 다르다”며 “로마 주거지를 철거하고 이들을 프랑스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은 프랑스 정치권과 유럽연합(EU)에 큰 파문을 일으켰지만 정작 그의 인기는 올라갔다. 이유는 프랑스의 치안 불안과 경제 악화다. 내년 3월 프랑스 지방선거와 5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로마를 범죄의 온상으로 낙인 찍고, 추방 의지를 밝히며 국민의 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로마 문제는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영국 런던에서는 올여름 대대적인 로마 거주지 해산작전이 펼쳐졌고, 체코에서는 로마 아이들을 교육에서 공공연히 배제시키고 있다. 로마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 입학했다가도 문제를 일으키면 정신질환 진단을 받고 특수학교로 보내진다. 처음부터 로마 전용학교에 입학하기도 한다. 슬로바키아 교육당국은 2008년 일반 초등학교를 다니던 로마 아이 3분의 2 이상을 특수학교로 강제 분리시켰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라 불리는 스웨덴에서도 경찰이 수백~수천 명의 로마를 불법 사찰·관리한 사실이 지난달 드러나며 논란이 일었다.



게으르다 편견 … 공교육 배제, 불법 사찰



 일련의 사건들은 로마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EU·유럽평의회 등에 따르면 유럽 전역을 떠도는 로마는 약 1200만 명에 이른다. 이들 중 80%는 빈곤층이고 3분의 1은 실업자다. 약 15%만이 의무교육을 마친다. 뉴욕타임스는 ‘또다시 희생양이 된 로마’라는 17일자 칼럼에서 “경제위기가 발발할 때 로마는 항상 희생양이 됐다”고 설명했다. 로마에게 주택과 일자리, 교육을 제공하는 것보다 경제난의 주범, 범죄자 등의 낙인을 찍어 추방시키는 것이 더 쉽다는 게 NYT의 설명이다. 실제로 런던 경찰은 로마 거주지를 해산할 때 영국을 즉시 떠나는 조건으로 루마니아행 비행기표를 무료로 제공했다. 로마에게 복지혜택을 주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보트피플 같은 난민을 대거 추방하는 것보다 로마를 추방하는 게 인권단체나 국제기구의 시선을 덜 끈다는 점도 손쉬운 선택을 부추긴다. 유럽에서 로마 차별 문제는 당분간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여전히 경제난에 허덕이는 데다 2007년 EU에 가입한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 대한 이주제한이 내년부터 풀리면서 로마를 막으려는 유럽 각국이 이민장벽을 점점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등선 의보·교육·집 주며 통합 노력도



 로마 문제의 해결책이 적게나마 제시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독일은 올여름 로마 어린이들에게 의료보험과 교육·주택 등을 제공하는 복지정책을 시작했다. 유럽 8개국이 3400만 유로를 들여 조성한 ‘로마 교육펀드’는 로마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줘 이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설립된 ‘로마 대학원 준비과정’은 로마 문제 해결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부유럽대에 9년 전 설립된 이 과정에는 매년 17명이 입학해 10개월 동안 대학원 입학을 준비한다. 학사학위 소지자들이 대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들을 수 있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면서 학비와 주거비·생활비도 준다. 교육을 통해 가난의 고리를 끊게 하고 이들을 사회에 통합하려는 노력이다. 유럽의회의 유일한 로마 의원이자 인류학자인 헝가리 출신의 리비아 자로카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로마가 범죄에 발을 들이는 것은 가난 등 경제적인 이유와 낮은 교육수준 때문”이라며 “교육·복지 등에 투자해 이들을 사회에 통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언·채승기 기자



국제기구선 ‘집시’ 대신 순례자 일컫는 ‘로마’로 지칭



9세기부터 인도 북부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유랑 민족으로,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계열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1940년대 독일 나치의 박해를 피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로 대거 이동했다. 현재 유럽 전역에 1000만~1200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집시·보헤미안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집시’에는 ‘이집트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과 다른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는 주로 이들이 ‘순례자’라는 의미로 스스로를 일컫는 ‘로마’라는 명칭을 공식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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