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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서울 수복(7)|부역자 처리(1)|6·25 20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

서울수복과 정부환도를 기뻐할 사이도 없이 제일 먼저 심각하게 고개를 쳐든 것이 소위 도강파와 잔류파와의 대립이었다. 물론 도강파란 한강을 넘어 남으로 피난 갔던 사람들이고, 잔류파란 대부분이 타의에 의해 적 치하에 남아있던 사람들이었다.
도강파는 자기들이야말로 「유엔」군과 함께 남침괴뢰군을 격파한 공로자라고 콧대가 높았고, 잔류파를 공산당에 협력한 부역자라고 몰아 세웠다. 그러나 잔류파는 도강파야 말로 적 남침 초에 자기들만이 몰래 도망친 비겁자라고 맞서고 적 치하에서 겪은 온갖 고초를 되새기며 가슴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있었다.
더욱이 잔류파로서 가장 복통이 터지는 것은 서울을 사수한다는 정부발표만 그대로 믿다가 적 치하에 갇혔다는 것과 한강교를 예고 없이 조기 폭파했다는 점이었다.
<"도강파는 가해자다" 규탄>
심지어 잔류파는 도강파를 자기들에 대한 가해자들이라고까지 규탄했다.
공산 남침으로 받은 막대한 물질적 피해는 시일을 두고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지만 도강파대 잔류파의 대립이나 단층에서 보는 바와 같은 「마음의 상처」는 쉽사리 아물 수 없었다는 점에서 6·25는 확실히 너무도 큰 민족의 비극이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서울에 환도한 정부는 부역자처리에 손을 댔다.
현실적으로 타의건 자의건 간에 적 치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심사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원고가 도강파이고 피고가 대부분 잔류파라는 점에서 이 부역자 처리는 처음부터 바람을 몰고 왔다. 이 문제에 대한 관계자들의 증언에는 우리 모두가 되새겨야 할 여러 교훈과 함께 별별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정희택씨(당시 군검경합동 수사본부심사실장·정보검사·전 중앙수사국장·현 변호사·55) 『서울이 수복되고 내가 소위 잔류파의 대표 격으로 부역자 등 처리를 위해 설치된 군검경합동 수사본부의 심사실장을 맡았어요.
6·25초에 서울서 피난을 못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잔류파」라고 했어요.
잔류파 중에는 살기 위해 괴뢰 측에 마지못해 부역한 사람, 끝까지 숨어서 괴뢰에 협력치 않은 사람, 적극적으로 부역한 사람 등 여러 층이 있었습니다. 나는 잔류파이면서 부역자들을 심사하게된 전후 곡절을 좀 이야기하겠어요. 6·25전에 나는 정보검사로 서울의 보도연맹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어요. 알다시피 보도연맹이란 일단 좌익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조직이예요.
6·25 1년전쯤부터 전국적으로 조직돼 모두가 33만명 이나 됐고, 서울서만 1만6천8백여명 이었어요. 맹원 중에는 일류문인·예술인·학자 등 쟁쟁한 사회명사들이 많았어요. 서울의 보련 본부는 지금 서소문 중앙일보자리에 있던 건물이었고 각 구 동별로 산하조직이 돼있었습니다.
<서소문에 보련 본부>
6·25가 터지자 나는 서울의 보련 맹원들을 각 구별로 집합시켜 그들의 동태를 장악했어요. 이들을 시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 안내·구호사업·「포스터」첩부 등의 일을 했어요. 서소문동 본부에서 나와 맹원 간부들이 지휘했지요.
일부 시민이 피난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l만6천8백 명의 보련은 일사불란하게 상부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27일 밤 12시32분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해 국방부차관실과 참모총장실에 『어떻게 되는 거냐』고 전화를 걸었더니 『염려 말라』는 겁니다. 이러고서는 l시간 반쯤 뒤인 28일 새벽2시5분에 한강다리를 끊은 거예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전화문의를 했을 때 국방부책임자와 참모총장 등은 도망갈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거짓말을 했어요. 나는 염려 말라는 대답을 듣고도 분위기가 어수선해 이영권 시경사찰분실장과 함께 차를 타고 성북서로 순시하러 떠났어요. 보련 간부들에겐 계속 꼼짝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해놓고요. 가보니 사태가 아주 좋지 않아 돌아서 국방부와 육본으로 갔더니 텅 비었어요. 여기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한강교 폭파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돼서 나는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는 보련 간부들에게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적 치하에 갇힌 거예요. 이때부터 나는 세 번 거처를 옮기며 땅꿀을 파고 들어가 숨어살았어요.
권총을 늘 사타구니에 감추고 잡히게 되면 자결할 각오를 했고요. 여하튼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9·28수복을 맞았는데 9월30일인가 이우익 법무장관이 왔다 기에 인사하러 찾아갔어요. 땅굴 속에 꼼짝 않고 쪼그리고 77일간을 앉아있어서 다리가 말을 잘 안 들어 굵은 지팡이를 짚고 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갔습니다. 을지로입구의 어느 건물 2층이었는데 인사가 끝나자 이 법무가 『앞으로 잔류파에겐 부역여부를 가리는 수사와 재판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말을 해요.
<살기 위해 부역한자는 훈방>
나는 너무 분하고 흥분해서 짚고있던 지팡이로 이 장관의 앞 책상을 내리쳤어요. 그리고는 『강 건너 피난 갔던 자들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심판할 수 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쌓였던 분풀이를 모호한 이 장관에게 한 셈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1개 사단 규모의 전향자들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검사에게까지도, 그것도 최후의 순간에 전화문의까지 했는데도 거짓말을 하고 저희들만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일반시민들은 말해 무엇합니까. 정부가 수도를 사수하니 시민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배신과 기만으로 애국시민들을 유기하고 도망친자들인데 무슨 염치로 잔류파를 재판한다고 하는 겁니까. 나는 정부책임자들은 노들강변(노량진)을 건널 땐 서울시민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받아야 건너올 수 있다고 했어요.
하여튼 이래서 나는 군 검 경 합동수사반의 심사실장이 됐어요. 부역자를 ABC의 셋으로 구분했는데 나에게 조서가 넘어온 부역자중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부역했고 죄상이 악질이 아닌 자는 대부분 C를 매겨 훈방했습니다.
그러나 거의 앞잡이가 돼 숨어있는 사람을 고발했다든가 적극적으로 괴뢰와 붙어 악질적인 행위를 한자는 A로 돌려 군재를 받게 했지요. 또 진짜 전향자인 보련 맹원 중 어느 정도 부역한자는 거의 C를 매겼습니다.
서울의 보련원들이 피난 못 가고 부역하게된 것은 어떤 의미로서는 내 책임도 있었으니까요.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일단 부역자로 몰렸던 서울 시민이 6만여 명이었고, 그중 A급으로 사형을 받은 자는 50명 미만인 것으로 알아요. 그때 A또는 B급으로 판정되어 기소됐던 사람들 중 오늘날 고급관리 정치인 등 사회각분야에서 활약하고있는 저명 인사가 많은데 20년이 지난 지금 이 부역문제를 개별적으로 소상히 밝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한편 부산에서 군 검 경 합동수사본부가 서울에 들어와 설치된 것이 10월5일께였는데 그 이전에는 각 수사기관이 독자적으로 부역자를 심사처리 하여 큰 혼선을 빚어냈다. 무고한 시민이 여러 기관에 계속 연행되어 곤욕을 치른 예가 허다했다. 다음은 그런 경우의 증언.
<여러 기관 중복수사로 피해>
▲송효순씨(당시 101헌병대장=중령·예비역 육군준장·전 한전이사·47) 『부역자 처리는 ABC 세 등급으로 나누어 처리했는데 우리 헌병대에서 조사한 것이 모두 5백여 명이고 이중 A급은 1백 명이 넘은 것 같아요. 6·25때 북에서 내려와 소위 「문화사업」을 하다가 잡힌 자들도 있었어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몇 명의 A급은 즉결 처분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부역자 문제를 신중히 다루기 위해 40대의 노련한 수사관 윤자경 대위(전 치안국장)를 조사과장으로 특별히 기용했어요. 아무래도 20대나 30대의 헌병장교보다는 나이가 듬직한 분들이 사려분별이 많거든요. 노덕술 대위도 이 일을 했어요. 그때 부역자로 몰렸던 사람들 중 지금 저명 인사들이 꽤 많아요. 심사과정에서 자칫 오판하면 애매한 사람들을 많이 다친 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 부역자 처리문제는 그때 서울의 잔류시민들에게 많은 불신풍조와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어요.
우선 헌병대에서 조사를 거친 사람도 그대로 끝나질 않았어요. 뒤따라온 경찰에서 또 잡아다 조사하고 이어 CIC, 심지어는 미8군 CIC 등에서도 이 문제에 관여했어요. 그러니 한사람이 같은 문제로 세 번, 네 번씩 조사 받고, 얻어맞고 했어요. 별로 부역죄상이 무겁지 않은데도 말이에요. 그리고 아주 골치 아프고 애먹었던 것은 평소의 감정을 이틈에 풀어보려고 무고를 일삼는 거예요. 이것을 가려내기에 애먹었어요.
<사원의 고발, 월권수사도>
초기에 수사기관들의 과잉수사나 월권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도 인정합니다.
잔류 시민들은 서울수복을 기뻐하면서도 「우리에게 피난 갈 기회도 안주고 너희들만 도망갔다 와서 이러기냐」는 식의 원성이 대단했습니다. 소위 도강파와 잔류파의 대립이라는 거지요. 참 가슴 아픈 일 이었어요. 잔류시민들이 할 말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하지만 적 치하에서 3개월 살았다는 것도 또한 엄연한 사실이예요. 정부가 시민을 피난 못시킨 점에서는 죄를 졌지만 도의적으로 죄진 사람들이 칼자루를 쥐고 잔류부역 시민을 단죄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말썽이 많았던 거지요. 한마디로 모순이지요.
한 피의자가 몇 군데서 조사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검경의 세부서가 합동 수사본부(본부장 김창용 육군준장)를 설치하고, 여기서 한번 조사를 받으면 다른 기관에서는 절대 손을 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 전화는 (28)821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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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