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예젠잉·덩잉차오·천윈 “4인방, 당내 문제로 처리”

1976년 10월 4일 밤, 당 제1 부주석 화궈펑이 소집한 정치국 회의장. 왼쪽부터 장칭, 장춘차오·화궈펑·왕훙원·왕둥싱. 이틀 후 장칭·장춘차오·왕훙원 등 4인방은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4인방의 일원인 야오원위안은 이날 회의에 불참했다. [사진 김명호]


1976년 9월 30일 오후, 예젠잉이 왕둥싱을 방문했다. “장춘차오와 장칭이 두 차례 밀담을 나눴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날 밤 예젠잉은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를 찾았다. 밀담을 나누던 중 원로 천윈(陳雲·진운)에게 사람을 보냈다. 칩거 중이던 천윈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집을 나서며 아들에게 금고 열쇠를 맡겼다. “중요한 문건들이 저 안에 들어있다. 내가 못 돌아오면 열쇠와 금고를 당에 보내라. 너는 열어보지 마라.”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4인방 문제로 머리를 맞댔다. 천윈의 제의에 동의했다. “잘못하면 내전으로 번질 수 있다. 피를 흘려선 안 된다. 당 내부문제로 처리하자.”

날이 밝자 예젠잉은 군사과학원 정치위원 쑤위(粟裕·속유)와 원장 쑹스룬(宋時輪·송시륜)을 불렀다. “경계를 강화하고 군 간부들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지시했다. 국·공전쟁 시절, 양자강 도하(渡河)를 지휘했던 쑤위와 1950년 겨울, 한반도 북단 장진호(長津湖)에서 미군에게 치명타를 안긴 쑹스룬은 장담했다. “4인방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 도대체 뭐 하던 것들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저것들 없애는 일이라면 당장이라도 짚신 신고 싸우겠다. 명령만 내려라.” 예젠잉은 이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당시 301의원에는 입원 중인 군 지휘관들이 많았다. 병원 인근 호텔에 4인방의 추종자들이 몰려들어 방을 잡았다. 보고를 받은 예젠잉은 침착했다. 지휘관들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냈다. “옆에 있는 호텔에 4인방 측 사람들이 많으니 주의해라. 회의를 하자고 부르면 절대 가지 마라.” 지휘관들은 핏대를 세웠다. “천하의 예젠잉도 나이를 먹더니 별 걱정을 다 한다. 염려 마라, 여차하면 총으로 쏴 죽여버리겠다”며 대표 두 명을 예젠잉에게 보냈다.

환자복 차림으로 찾아온 지휘관들에게 예젠잉은 차분히 말했다. “아프지도 않은 놈들이 병원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거 내가 잘 안다. 빨리 병원들을 나와라. 군복 입고 각자 부대로 돌아가서 병력을 장악해라. 왕훙원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근처로 이사 왔다. 위험하니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라. 이제 피 흘리는 싸움은 그만해야 한다.”

10월에 들어서자 4인방은 화궈펑을 집중적으로 몰아붙였다. 궁지에 몰린 화궈펑도 결전 태세를 갖췄다. 왕둥싱과 만나는 횟수가 눈에 띄게 빈번했다.

10월 2일 오후, 예젠잉이 왕둥싱의 집무실을 찾았다. 왕둥싱은 방문부터 걸어 닫았다. ‘慶父不死 魯難未已(우두머리를 없애지 않으면 편할 수가 없다)’며 빨리 손을 쓰자고 재촉했다. 훗날, 왕둥싱은 이날의 대화를 자주 회상했다. “예젠잉이 내 귀를 잡아 끌었다. 뭐든지 때가 무르익어야 한다.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신속하게 허를 찔러야 한다. 무슨 싸움이건 순식간에 희비가 엇갈린다. 방심은 금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싸우면 결국은 여자가 이긴다. 장칭을 여자로 생각하면 우리가 진다. 적으로 여겨야 한다.” 왕둥싱이 “원수와 화궈펑 동지 두 분이 이끌고, 정치국원 다수가 동조합니다. 이기는 싸움입니다”라고 하자 예젠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나서려던 예젠잉이 다시 몸을 돌렸다 “요즈음 장칭이 화장실에 자주 간다고 들었다. 한번 가면 머무르는 시간이 길다는데 사실이냐.” 왕둥싱은 장칭의 건강상태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변비는 없지만 소변 보기를 힘들어 합니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예젠잉이 중얼거리듯이 한마디 했다. “장칭도 머리가 복잡하구나. 생각이 많을 수밖에.”

왕둥싱의 집무실을 나온 예젠잉은 화궈펑을 찾아갔다. 의견 일치를 확인하고 옥천산(玉泉山) 숙소로 돌아갔다. 그날 밤 9시, 왕둥싱은 화궈펑에게 예젠잉과 나눴던 대화를 보고했다. 화궈펑은 “4일 밤 정치국회의를 열겠다. 저들이 회의 내용에 골몰하는 동안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세워라. 시간이 하루밖에 없다.”

1976년 10월 6일 수요일(음력 윤 8월 13일), 오후 3시 반, 예젠잉의 경호원과 운전기사 집무실에 홍색전화의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오늘 밤 8시 중난하이 화이런탕(懷仁堂)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회의가 열린다. 1시간 전에 도착해라.”

80고령의 예젠잉은 이른 저녁을 들었다. 경호원 한 사람만 대동하고 옥천산을 떠났다. 80년대 말, 영화감독으로 대성한 딸이 홍콩의 한 출판사 회의실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아직도 그날의 정경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말만 남겼다. 무슨 일인지 별생각이 다 났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경호원도 회고담을 남겼다. “우리는 5시에 출발했다. 원수는 장칭이 머무르는 댜오위타이(釣魚臺)를 지날 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중난하이가 익숙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질문이 이어졌다. 화이런탕에 후문이 있느냐? 차 진입이 가능하냐?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했다.” <계속>

관련기사
▶ 4인방, 덩샤오핑·예젠잉 거세게 공격
▶ 예젠잉 추도식에 부인들 참석 막은 덩샤오핑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