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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511> 한국 힙합의 역사

이경희 기자
지난 여름 막바지 대중문화계는 힙합 ‘디스(disrespect의 줄임말)전’으로 후끈했습니다. 내로라 하는 래퍼들이 실시간으로 다른 힙합 뮤지션을 공격하는 랩을 만들어 올리면서 화제가 됐지요. 힙합을 빼놓곤 한국의 대중음악을 논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저 먼 대륙에서 태어난 흑인 음악이 어떻게 한국으로 와 주류로 정착했을까요. 한국 힙합의 역사를 들여다봤습니다.

이경희 기자

# 미국 힙합의 태동

1970년대 뉴욕의 흑인 동네 뒷골목에선 질펀한 파티가 열렸다. DJ가 신나는 음악을 틀어 분위기를 달구면 누군가는 그 리듬에 맞춰 이런 저런 지껄임(Rap)을 쏟아내고, 젊은이들은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 한쪽에선 스프레이 페인트로 벽면에 형형색색의 화려한 낙서를 그린다. 바로 힙합의 4대 요소인 디제잉(DJing)·엠씨잉(MCing)·브레이킹(Breaking)·그래피티(Graffiti)가 어우러진 순간이다. 자메이카 레게 등 이민자들이 가져온 문화가 뒤섞이며 탄생한 힙합은 70년대 후반 DJ 쿨 허크, 힙합의 대부 아프리카 밤바타 등에 의해 대규모 파티와 공연으로 발전해 나간다. 슈가힐 갱의 ‘Rapper’s Delight’가 힙합 역사상 최초로 빌보드 톱40에 오른 79년은 세계 힙합의 원년으로 기록된다. 84년 런-디엠씨(Run-DMC)가 힙합의 사운드와 가사 등 기본적인 음악 문법을 확립해 랩 그룹 최초로 100만 장 판매액을 기록했다. 힙합이 비로소 새로운 형태의 대중음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 한국 최초의 랩

 한국 최초의 랩은 흥미롭게도 홍서범의 ‘김삿갓’(1989년)이다. ‘옥슨80’ 출신의 로커에서 발라드 가수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그가 내놓은 이 곡은 음표는 하나도 없이 모든 가사가 랩으로 처리된 곡이었다. 물론 대중의 기억 속엔 멜로디가 있는 후렴 부분이 있지만 이는 방송용으로 편곡한 것이고, 앨범에 실린 원곡은 완전한 랩이었다. 홍서범은 힙합이나 랩이라는 단어를 쓰진 않았다. 다만 “미국에서 유행하는 음악인데 한번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밝힌 바 있다.

# 1990년대 랩 댄스 시대


 한국에선 정통 힙합이 들어오기 이전에 과도기적 형태로 ‘랩 댄스’ 장르가 자리 잡았다. 랩이 가미된 댄스 음악이다.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90년 리믹스 버전은 초창기 랩댄스를 대표하는 곡이다. 90년대 랩댄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현진영·서태지·이현도를 꼽을 수 있다. 현진영과 와와(90년)의 데뷔 앨범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슬픈 마네킹’은 미국에서 80년대 후반부터 크게 유행한 ‘뉴 잭 스윙’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음악이다. 뉴 잭 스윙은 펑크에 브레이크 비트를 변형한 힙합 리듬에 서정적이고 말랑말랑한 멜로디를 더한 장르로서 본격적인 힙합으로 가기 전단계에 해당하는 장르다. 현진영의 또 다른 히트곡 ‘야한 여자’는 외국 래퍼가 부른 랩 버전이 함께 수록됐다. ‘랩’이라는 개념을 앨범에 밝힌 첫 사례다.

 랩을 폭발적으로 유행시킨 건 누가 뭐래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92년)다. 데뷔 앨범에 실린 ‘환상 속의 그대’는 가장 정통적인 형태의 랩이 담긴 노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두 번째 앨범에선 자메이칸 랩 스타일의 헤비메탈에 국악을 혼합한 ‘하여가’를, 세 번째 음반에선 랩 메탈 스타일의 ‘교실 이데아’를 앞세워 히트를 이어간다. 95년에 발표한 서태지와 아이들 마지막 앨범에선 갱스터 힙합 스타일의 ‘컴 백 홈’이 큰 반응을 얻었다. 미국의 그것처럼 저속한 언어나 강력한 사회비판이 담기진 않았지만 랩의 메시지 전달 기능은 충실히 해낸 곡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울러 헐렁한 힙합 패션까지 유행시켰다. 서태지는 그룹 해체 이후 록 음악에 매진하고, 서태지에 가려졌던 양현석이 양군기획(현재의 YG엔터테인먼트)을 설립하면서 흑인 음악의 산파 역할을 하게 된다.

 이현도는 힙합이나 랩에 관한 한 90년대 중반까지 가장 많은 콘텐트를 쏟아낸 인물이었다. ‘나를 돌아봐’ ‘굴레를 벗어나’ 등 멜로디 변화가 크지 않으면서도 긴박한 댄스뮤직의 리듬감을 띤 음악은 이현도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이현도는 힙합을 기반으로 재즈·펑크·테크노 등 서로 다른 스타일을 버무리는 부분에선 독보적인 재능을 뽐냈다. 힙합을 대중이 본격적으로 의식하게 한 인물이자 패션과 춤, 이미지까지 어우러진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간 주역이었다. 듀스 3집 ‘Force Deux’는 한국 힙합 대표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

#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태동

 95년 말 PC통신 하이텔 소모임 ‘소울 트레인’은 흑인 음악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게시판이었다. 이것이 확대 발전해 1997년 온라인 힙합 동호회 ‘블렉스’가 탄생했다. 그해에 첫 앨범 ‘블렉스: 검은 소리, 첫 번째 소리’가 발매된다. 메이저 음반사나 전문 스튜디오를 거치지 않고도 동호회 회원들의 능력과 기술로만 음반을 제작했다. 블렉스는 음악 감상 동호회에서 점차 창작과 공연 위주의 모임으로 재편성됐다. 힙합 뮤지션 가리온과 주석이 블렉스가 배출한 양대 산맥이다. 한편 PC통신 나우누리에서 출발한 블랙 뮤직 전문 동호회 ‘돕 사운즈’는 감상과 비평 중심으로 발전했다. 99년 돕 사운즈에서 창작 동호회 ‘쇼 앤 프루브(SNP)’가 분화되어 나갔다. SNP는 피타입·버벌진트·포워드·데프콘 등을 배출했다.

 97년 한국 첫 오버그라운드 힙합 그룹 지누션이 데뷔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양현석이 책임 프로듀서였고, 듀스의 이현도는 수록곡 절반을 작곡했다. 지누션의 히트곡 ‘말해줘’는 90년대 히트곡 중 랩의 비중이 가장 높은 곡 중 하나다. 김진표와 업타운도 같은 시기에 힙합의 작법을 전면적으로 끌어안았고, 대중적 인기도 누렸다. 아이돌 댄스 뮤직이 가요계를 평정한 상태에서 일으킨 작은 돌풍이었다.

 99년 힙합 컴필레이션 앨범의 시대가 열렸다. 온라인 동호회 아마추어 래퍼들이 모여 만든 ‘블렉스 vol.2’엔 주석과 가리온의 곡이 들어 있었다. 양현석이 이끄는 YG 패밀리의 첫 컴필레이션 ‘Famillenium’은 소속 뮤지션이 의기투합해 만든 앨범. 힙합 ‘크루(crew·무리)’ 개념을 바탕으로 제작한 최초의 컴필레이션이다. ‘1999 대한민국’엔 드렁큰 타이거, 업타운, 룰라의 고영욱, 쿨의 김성수, 허니 패밀리와 엑스틴 등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를 망라하는 래퍼들이 참여했다. 이 앨범은 2000년대 초까지 이어진 힙합 컴필레이션 앨범 붐의 도화선이 됐다.

# 한국어로 랩 하기란

 92년 재미교포 출신 서정권(타이거 JK)이 미국식 랩을 선보이지만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익숙했다. 마찬가지로 90년대 초·중반에 사랑받은 솔리드의 이준이나 업타운의 스티브, 카를로스 역시 한국어 가사를 쓸 수 없어 작사가에게 글을 받아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라임(rhyme·운율)이나 플로(flow·흐름)가 엉망이거나 조악한 곡이 많았다. 그래서 해외파 래퍼들은 상당수의 곡에선 오로지 영어 랩만 구사하기도 했다. 영어 랩은 청자에겐 세련된 인상을 주는 이점도 있었기에 한국 힙합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어 랩의 라임이란 일차원적이었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남들 다 하는 외식 한번 한 적이 없었고/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언제나 혼자서 끌여 먹었던 라면’(god ‘어머님께’, 1999년)에서처럼 ‘고’와 ‘면’ 같은 각운만 맞추는 식이었다. 버벌진트가 2001년 발표한 ‘모던 라임스 EP’는 ‘3차원 라임’을 보여주며 커다란 변화를 불러온다. ‘1990년대 말을 잘 기억해 난/힙합을 말하던 대다수가 거센 말투와 어색한 허우대만 찾으려 하던 때 한/명의 팬으로서 제발 어서 그 저개발 상태를 벗어나서 크기를 바랬어’(버벌진트, ‘overclass’, 2001년) 이후 한국어 랩은 같은 글자에 구속되지 않고 자음과 모음의 연속된 흐름 속에 유연하게 녹아 들며 우리말 고유의 멋과 맛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90년대식 랩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 주류로 떠오른 한국 힙합

 드렁큰 타이거는 ‘good life’로 2001년 6월 SBS 인기가요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한다. 2005년 발매된 에픽 하이의 ‘Fly’는 각종 음악 방송 1위를 휩쓴다. 비슷한 시기에 3집을 낸 리쌍도 ‘내가 웃는 게 아니야’로 인기를 누린다. 힙합 뮤지션들의 인기가 2000년대 중반 들어 궤도에 오른 것이다.

 YG엔터테인먼트가 2006년 힙합 그룹으로 데뷔시킨 빅뱅은 한국 주류 대중음악이 배출한 최초의 흑인 음악 아이돌이다. 빅뱅은 K팝 한류의 대표 주자로서 한국적 힙합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역할도 해 왔다. 빅뱅의 멤버이기도 한 지드래곤은 솔로 프로젝트로 빌보드 메인차트 200위권에 두 번 연속으로 진입했다. 최근 발매한 앨범 ‘쿠데타’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온라인판에서 “머지않아 (미국 음악을) 모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K팝이 다른 방향으로 보이게 될 것이고, 세계는 그로부터 배울 것”이라 보도했다. 한편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래퍼 윤미래는 올해 미국 음악채널 MTV가 선정한 ‘세계 최고 신예 여성 래퍼 12인’에 선정됐다.

참고 서적 『한국 힙합-열정의 발자취』(김영대 외 5명 지음, 한울), 『힙합, 우리 시대의 클래식』(김영대·김봉현 지음,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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