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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제6화>창군전후(3)|이경석(제자는 필자)

나는 스마트라 섬에서 해방을 맞았다. 제25군이 주둔한 이 섬에서 철도부대에 소속해 있었다.
우리가 패전을 알리는 일본천황의 방송을 들은 것은 8월16일이었다. 제25군에서는 전도에 걸쳐 비밀문서 소각령을 내렸고 가장 소중히 여기던 연대기도 불태워 버렸다.
이때 내가 거느린 철도부대는 현역보다 문관이 훨씬 많았다. 항복직후에는 부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끝까지 부하들을 데리고 행동할 결심이었으나 소수군인 때문에 많은 문관대원들이 민간인 우선 원칙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을 안 다음부터 부대를 해산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이같이 결심을 바꾼 후 나는 우리 청년들을 모아 「계림부대」를 만들었다. 2백여 명의 계림부대원과 같이 3백여t크기의 배로 간신히 스마트라 섬을 떠나 우선 동포들이 집결한 싱가포르로 갔다. 싱가포르에서 동포들과 합류, 일본선원들이 운항한 3천t급 LST로 대만을 거쳐 그리던 조국의 인천항에 입항했는데 대만 기융항에서 신문호외를 통해 홍사익장군이 비도 제14방면군의 포로수용소장이던 책임을 처형됐다는 비보를 들었다.
나는 육사옛과 재학중인 1930년 겨울방학을 천섭시에 있던 그의 자택에서 보낸 일이 있다. 어느 날 그에게 『우리는 언젠가는 자치정부를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그는 『틀린다. 완전독립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당시 일본군 중좌의 이 같은 말에 나는 새삼 놀랐었다.
남방에 있던 일본군들은 대개 이런 경로로 귀국했거니와 만주 혹은 중국본토에서 해방을 맞은 군인들의 귀국도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만주 관동군에는 고 원용덕(예비역중장)·신학진(예비역소장·현 오양건업 회장) 중좌를 비롯하여 정일권(예비역대장·전 국무총리)·백선엽(예비역대장·전 교통장관)·이한림(예비역중장·현 건설장관)등 수십명의 장교가 있었다.
이들은 해방을 맞이하자 곧 광복군을 편성,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 나섰다. 신경영락소학교에서 광복군이 수천의 장병을 모아 훈련시키고 있을 때 소련군은 소위 연락장교를 이 광복군사령부에 파견했고 하루에도 수십 건씩 교포들에게 만행을 가했다.
한국 부녀에 대한 희롱사건을 발단으로 광복군과 소련군 사이에 드디어 충돌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정일권상위는 소련군구치소에 수감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정상위는 어느 날 탈옥하려다 발각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정상 위를 실은 북행열차는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사정없이 달렸다. 이왕 죽은 몸이라고 생각한 그는 열차가 하르빈을 지났을 때 차에서 뛰어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마침 감시병이 졸고 있었다. 느닷없이 감시병을 넘어뜨리고 정상위는 질주하는 기차에서 사력을 다해 뛰었다. 큰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은 요행이었다. 그는 중국 옷으로 변장하고 여러 날을 걸어 한만 국경을 간신히 넘었다.
그가 평양에 당도했을 때 미리 귀국했던 최주종(예비역소장·현 주택공사총재)·백선엽을 만나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북괴치하의 잔인함을 얘기 듣고 정상위는 곧장 남하했던 것이다. 이때 백선엽은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을 친위하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선생이 연금되고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 백선엽 또한 황급히 월남했다.
중국본토에 있었던 광복군의 귀국에도 애로가 많았다.
임정의 김구주석은 학수고대하던 해방을 맞자 『임정대표가 조선총독과 재한 일본군사령관의 항복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으로 광복군참모장이던 이범석 장군을 8윌17일 광복군 국내 정진군 총지휘로 임명, 서울에 진주하도록 명령했다.
이 장군은 장준하(현 국회의원)·김준엽(고대교수)과 미군연락장교단장 버튼 대령·정운수 대위 등을 대동하고 미군용기로 다음날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무조건 항복이란 날벼락에 넋을 잃고있던 일군의 비행장 경비병들은 갑자기 날아온 미군기를 보고 한동안은 당황했으나 곧 비행기를 포위하고 총구를 겨누는 것이었다.
일행으로부터 일본어로 광복군이 환국 하는 것이란 설명을 듣고도 그들은 상부와 연락한 뒤 『본국정부로부터 아무 명령을 받은바 없으니 24시간 안에 되돌아가라』고 요구했다. 이 장군은 옥쇄를 각오하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미 연락장교는 『위험하니 절차를 밟도록 하라』면서 만류했다.
결국 광복군의 개선은 일본패잔병의 최후발악에 의해 저지되고 기수를 중국으로 되돌리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광복군의 귀국은 한동안 암담했다. 11월23일 임정요인들이 환국한 훨씬 뒤에도 이청천 광복군사령관과 이범석 참모장을 비롯한 많은 광복군은 그대로 북경과 상해 등지에 흩어져 있었다.
북경지구 광복군 본부에는 김광언 참령을 중심으로 이성가 군사부장(예비역소장·현 오스트리아 대사)·김영오 군수부장·유해준 정훈부장(예비역소장) 최춘선 섭외부장·정내정부관(현 국회의원)이 참모진을 이루었다.
이때 열하성을 넘어 북경에 당도한 박정희(현 대통령)·이주일(예비역중장·현 감사원장) ·신현준(예비역해병중장) 등은 중대장 혹은 대대장직을 맡아 오합지졸의 광복군을 훈련시켜 짧은 시간에 정병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결국 장개석 장군의 광복군 복원회에 따라 군복을 벗고 민간인 자격으로 이듬해 봄 천진을 떠나 귀국했으며 상해에 발이 묶였던 장경순(예비역중장·현 국회부의장)·황용주(전 문화방송사장)·민충식(현 호주대사)등은 귀국선을 교섭하다 안돼 송환 데모를 벌인 끝에 미군LST편을 얻어 돌아왔다.
이청천 사령관과 몇 명의 광복군 간부들은 광복군이 진 빚을 청산하느라 47년4월에야 귀국했다.<계속>(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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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