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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국제화 수준? 10점 만점에 6점 정도”

서울대 외국인 교원으로는 처음으로 보직을 맡은 버나드 에거 교수는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의 가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조용철 기자
버나드 에거(38) 서울대 교수는 서울에 와서 5년간 ‘에드가’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2003년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박사과정 입학 당시 교직원이 그의 성(姓) ‘에거(Egger)’를 잘못 알아듣고 학교 전산시스템에 ‘에드가’라고 입력했기 때문이다. 학생증에도, 각종 서류에도 ‘에드가’였다. 강제 개명을 당한 꼴이었다. 몇 번이나 수정을 요청했지만 “서류 과정이 복잡하다”는 얘기를 듣고선 포기했다. 2008년 박사과정을 마친 그의 졸업증명서마저 처음엔 잘못된 이름으로 발급됐다.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런 해프닝은 당시 서울대 301·302동 신공학관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그가 겪었던 여러 불편함 중 하나였다.

서울대 첫 외국인 보직 교수 된 버나드 에거

 버나드 에거는 지난달 초 서울대 역사상 외국인 교수로는 최초로 보직을 맡았다. 서울대 공과대학의 ‘정보화·국제화 본부장’이란 직책이다. 외국인 교원의 편의를 증진하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다. 외국인이라는 점을 빼도 그가 컴퓨터공학부 조교수인 데다 30대라는 점에서 발탁 인사로 화제를 낳았다.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은 “학교 국제업무를 외국인이 맡아서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지금까지는 의사소통 문제 등으로 직책을 맡기는 데 애로가 있었다. 에거 교수는 한국말을 잘하는 데다 한국문화를 잘 알아 보직교수로 손색이 없다”고 설명했다.

 중앙SUNDAY 인터뷰에서도 그는 “1주일에 회의가 12번 정도 있어서 정신이 없다”며 한국어 대화를 고집했다. 조금 어색하지만 웬만한 수준의 자연스러운 한국어 억양이었다. 연구실 문엔 그의 한국어 이름 ‘이강웅’만 적혀 있다. 버나드(Bernhard)는 옛 게르만어(Germanic)로 ‘힘이 센 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굳셀 강(强)’에 ‘곰 웅(熊)’자를 써서 ‘강웅’이라고 지었다. 이(李)씨 성은 에거(Egger)의 첫 글자 ‘E’에서 따왔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에서 석사까지 받은 그는 박사과정 대학을 물색하다 아시아에 눈길이 갔다고 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성공하려면 미국으로 가야 했지만 새로운 길을 걷고 싶었다”고 했다.

힘센 곰’ 버나드, 한국 사람 ‘강웅(强熊)’으로
왜 한국이었을까. 그는 “한글과 같은 고유의 과학적 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에 끌렸다”고 했다. 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생긴 것도 작용했다. 친구들은 ‘북한과 가까운 나라라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박사학위 취득 후엔 삼성종합기술원에서 근무하다 2011년 모교 서울대로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그는 모국어인 스위스 독일어와 라틴어·프랑스어·영어에 두루 능통하다. 하지만 한국어의 존댓말·반말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직도 “장모님이 제게 여쭤보셨어요” 같은 실수를 하고 회의석상에선 높은 사람들만 주로 발언하는 아시아 특유의 문화에도 적응이 덜 된 편이다. 특히 회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한자어는 여전히 어렵다. “회의에선 국어 듣기 연습만 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한국에 온 지 11년째. 아침엔 원두커피 대신 커피믹스를 찾을 정도로 한국사람이 다 됐다. 인터뷰 당일에도 조교에게 전화로 “미안한데 커피믹스 좀 갖다줄래?”라고 한국어로 말했다. 전화를 끊은 후 “이런 거 애들에게 시키면 미안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박사과정 중 만난 한국인 여성과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지난해 봄 결혼했는데 올봄에 딸 ‘안나 연이 에거’를 낳았다. “부인이 여섯 살 어리다”며 “난 도둑놈이다”라고 웃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한국 속담은 내 경우엔 통하지 않았다”는 그는 “현진이(부인 이름)에게 3년이나 차 마시자고 졸라서 겨우 사귀기 시작했는데 열 번 아니라 백 번 공을 들인 셈”이라고 했다.

 결혼식은 웨딩 촬영부터 시작해 100% 한국식으로 치렀다. 스위스에 사는 부모님과 친구들을 한국으로 초대했다. “한국 결혼식은 돈이 많이 들어서 축의금을 안 받을 수 없었다”며 능청도 부렸다. 부인의 고향인 경남 통영을 ‘친정’이라 부르며 명절 때마다 꼭 들른다고 했다. 영주권도 생기면서 지방선거 땐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어엿한 한국인이 된 셈이다. 올해 스위스 부모님을 뵈러 간 자리에선 자신이 익숙했던 스위스 속담을 잘못 말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미국인’이라는 인식에도 일침을 놨다. 그가 한국에 온 2003년 즈음 반미 감정이 확산됐을 때였다. 그를 “미국 사람”이라고 오해한 한국인들이 많았다고 했다. ‘외국인 사절’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입장을 거절당하기도 했고, 거리에서 마주친 아이가 그를 보고 “엄마, 저기 미국 사람”이라고 했다는 거다. 한때 ‘미국 사람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였다.

“여섯 살 어린 한국 여성과 결혼 … 난 도둑놈”
보직을 맡은 사연을 묻자 그는 교내 헬스클럽 얘기를 꺼냈다. 운동을 하며 우연히 이건우 공대 학장을 마주칠 때마다 외국인 교수로서 느끼는 점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러면 이 학장은 “때가 되면 날 도와달라”는 말을 했고, 그는 당연히 “그럼요”라고 답을 했다는 것. 그런데 그 결과가 정보화·국제화 본부장 임명이라 본인도 얼떨떨했다고 한다. 임명 후엔 우선 외국인 교직원들이 겪는 문제를 파악하느라 바쁘다.

 외국인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2003년에 비해 요즘 상황은 상당히 호전된 편이다. 그는 “박사과정 당시 졸업 규정을 영어로 안내하는 게 안 돼 있어 강의 하나를 안 들어서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금은 영어 강의며 외국인 교수 숫자도 늘어나 많이 발전했다. 2003년 당시 국제화 점수가 10점 만점에 1점 수준이라면 지금은 6점”이라고 했다.

 갈 길은 멀다. 회식을 할 경우 일반음식점으로 등록된 식당에서만 해야 한다든지, 교무 관련 사항을 입력하는 과정이 한국어로만 가능하다든지 하는 부분은 그가 특히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외국인 교원·학생을 위한 ‘원스톱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할 구상도 갖고 있다.

 그는 외국인 교원과 학생 간의 ‘가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박사과정에서 일부러 한국어만 쓰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익혔듯 앞으로도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겠다는 각오다. 후배 외국인 교원들을 위해 새 길을 만든다는 생각에 자부심도 강하다.

 한국과 스위스의 차이점은 그에게 흥미로운 부분이다. 특히 한국의 대학입시 문화는 충격이었다. 그의 모교인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는 입학시험이 따로 없다. 고교 졸업장만 있으면 대부분 입학이 가능한 대신 1년 후 50%를, 2년 후 또다시 50%를 솎아내 입학 정원의 4분의 1만 남긴다고 한다. 그는 “컴퓨터엔 소질이 있는 학생이 영어를 못해 컴퓨터공학과에 가지 못하는 일이 스위스에선 없다”고도 지적했다. 두 나라 시스템의 장단점을 잘 아는 그에게 정보화·국제화 본부장 직책은 잘 맞는 옷인 셈이다.

 한국계 외국인을 포함하면 서울대 공대의 외국인 교원 비율은 현재 5% 안팎이다. 순수한 외국인 교수는 공대에서만 7명이다. 그의 말이다. “외국인 교원들을 위한 특별 대접을 원하는 건 아니다. 서울대는 물론 한국 대학에 뛰어난 외국인 교수들이 온다면 한국사회 발전에 전반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외국인 우대가 아니라 외국인이라서 생기는 불편함을 풀어줘야 대학 국제화가 이뤄진다는 얘기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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