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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전에 짧은 창검 꽂은 ‘과선’ 개발 … 거북선으로 진화

‘황비창천(煌丕昌天:아주 화창한 하늘)’이 새겨진 고려 구리거울. 고려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조선강국이다. 조선강국의 DNA를 고려의 조선기술에서 찾는 일은 지나친 역사적 상상력일까. 고려는 당시 독자적인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기술로 만든 선박을 고려선(高麗船)이라 한다.

고려사의 재발견 명품 열전 ⑨ 고려선(高麗船)

“1274년(원종15) 원나라 황제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김방경(金方慶)과 홍다구(洪茶丘)에게 전함(戰艦)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 나라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데 만약 만양(蠻樣·蠻은 남중국, 즉 남송) 식으로 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제때 만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전라도에 있던 김방경은 이에 고려의 조선기술(本國造船樣式)로 배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고려사』 권104 김방경 열전)

남송(南宋)식보다는 고려 기술로 전함을 제작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단기간에 전함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과 다른 조선기술을 고려가 확보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실제로 김방경은 고려 기술로 전함을 제작했다. 그런 사실은 다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장군 나유(羅裕)가 원나라에 보고하기를, ‘금년(1274년) 정월 3일 대선(大船) 삼백 척을 건조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공(許珙)을 전주 변산(邊山)에, 홍록주(洪祿遒)를 나주 천관산(天冠山·장흥)에 각각 보내 재목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시중 김방경을 도독(都督)으로 삼아 정월 15일 함께 모여 16일에 시작해 5월 그믐에 크고 작은 배 구백 척을 완성했습니다. 지금 배들은 금주(金州·김해)로 출발했습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27 원종 15년(1274) 6월조)

원나라 황제의 명령대로 이해(1274년) 정월에서 5월까지 모두 900척의 전함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만양식, 즉 남송의 기술이 아니라 고려 독자의 조선기술로 불과 다섯 달 사이에 건조했다. 이렇게 만든 900척의 전함으로 이해 10월 고려는 몽골군과 함께 제1차 일본 정벌에 나선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간행한 『고려, 뱃길로 세금을 걷다』 표지의 고려선 조감도.
日 정벌 당시 中 전함보다 실전에 유용
1281년 원나라는 고려군 외에 원나라에 복속된 남송 출신의 군사까지 징발해 제2차 일본 원정에 나섰으나 역시 정벌에 실패했다. 실패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자(충선왕)가 황제를 뵈었을 때… 정우승(丁右丞)이란 자가 아뢰기를, ‘(2차 정벌 때) 강남(江南·남송)의 전선(戰船)은 크기는 하지만 부딪치면 깨어졌습니다. 정벌에 실패한 원인입니다. 만약 고려에서 다시 배를 만들게 해 일본을 치면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30 충렬왕 18년(1292) 8월)

선체는 크지만 쉽게 파손된 남송 전선의 취약점을 언급하면서, 정벌에 성공하기 위해선 고려에서 배를 만들 것을 주문한 내용이다. 즉 고려의 전함이 작기는 하나 매우 튼튼해 실전에 매우 유용하다는 얘기다. 당시 중국인도 일본 정벌 당시 ‘크고 작은 전함이 파도에 휩쓸려 많이 부셔졌으나 오직 고려의 전함은 튼튼해 온전하였다’고 증언한 사실(『秋澗先生大全文集』 권40 汎海小錄)이 그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고려는 값싼 비용으로 빠르게 배를 만들면서도 중국 전선보다 단단하고 견고한 독특한 선체 구조를 가진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선의 모습과 제작기술의 특성은 무엇일까.

“(고려) 관선(官船)의 만듦새는 위는 띠를 이었고 아래는 문을 내었다.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배의 좌우를) 가로지른 나무(橫木:혹은 駕木·멍에)를 서로 꿰어 치켜올려서 포판(鋪板·누각)을 만들었는데, 윗면이 배의 바닥보다 넓다. 선박 몸체는 판책(板簀·판자)을 쓰지 않고, 다만 통나무를 휘어서 굽혀 나란히 놓고 못을 박기만 했다.”(『고려도경』 권33 주즙(舟楫) 관선조)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기록한 고려선의 모습과 제조 기술이다. 고려선은 전체적으로 판자를 쓰지 않고 통나무 형태를 그대로 가공해 제작했다. 자연히 두꺼운 외판(배 옆면)과 무거운 저판(배 밑면)으로 제작돼 외형이 둔중하고 속도가 느려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선체가 무거워 바람이나 파도에 쉽게 전복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선은 전함이나 물자·식량을 운반하는 조운선에 적합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선은 대부분 목질이 강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를 재료로 해 제작되었다(문경호, 『고려시대 조운제도의 연구와 교재화』, 2012년). 앞에서 말한 대로 일본 원정용 전함 제작을 위해 그 재료를 변산반도와 장흥 천관산에서 구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도 선박용 소나무 제작을 위한 산(封山)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소나무가 풍부했다.

배 밑바닥이 넓은 평저선 구조가 강점
고려선의 건조 기술은 다음과 같다. <그림 참고> 소나무와 같은 원목을 여러 개 결합해 평탄한 저판(배 바닥)을 만들고, 거기에다 미리 조립한 선수재(船首材이물비우)와 선미재(船尾材고물비우) 등을 고착시켰다. 굵은 가룡목(駕木)을 배의 외판, 즉 배의 좌우 바깥으로 뚫고 나오게 한다. 그 위에 나간을 세우거나 갑판을 깔았다. 이렇게 설치된 여러 개의 가룡목이 선체 내부의 칸막이 구실을 했다. 칸막이를 중국과 같이 판자나 삿자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가룡목을 뱃전 밖으로 연장해 그곳을 잘 이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선박의 큰 특징이다. 따라서 배의 모양은 배의 옆 부분이 좀 부른 장방형의 상자 모양이었다. 이러한 선박 구조는 배의 밑바닥이 좁은 첨저선형(尖底線型)의 배에는 사용할 수 없다. 실제 고려선은 배의 밑바닥이 넓은 평저선형(平底船型)을 특징으로 한다.(김재근, 『한국 선박사연구』, 1984년) 이러한 선박 제조 기술은 이미 고려 초기에 나타난다.

고려의 군선(軍船) 역시 이러한 선박 구조를 갖고 있다. 궁예 정권 때 왕건은 개성 해상(海商·바다상인) 세력의 후예답게 직접 군선을 제작해 커다란 공을 세웠다.

“(914년 궁예는) 왕건에게 배 백여 척을 더 만들게 했다. 큰 배 10여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步)이며 위에 망루를 만들고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군사 삼천여 명과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다.”(『고려사』 권1 태조총서)

후백제 근거지인 나주를 공격하기 위해 태조 왕건은 16보(96자, 1보는 6자), 즉 길이 약 30m나 되는 큰 선박을 제조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중국의 전선이 평균 15m 정도임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대형 선박을 제조할 능력을 보유했다. 9세기 후반 이래 장보고의 활약과 개성의 왕건 집안 등 해상 세력이 대두하고, 이들은 대내외 해상무역을 위해 선박을 제조하면서 고려 초기에 대형 선박을 제조할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근래 일본에서 발굴된 자료의 일부다. 1018년(현종10) 4월 고려는 진명 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府署·함경도 덕원 소재)에서 여진의 해적선 8척을 사로잡았는데, 이때 잡혀 있던 일본인 남녀 259명을 일본에 돌려보낸 사실이 있다. (『고려사』 권4) 이때 귀국한 일본인이 당시 전투에 사용된 고려 병선(兵船)을 목격한 기록이다. 현종(1009~1031년 재위) 당시 고려 병선의 특징이 잘 묘사돼 있다.

여진족 해적 퇴치와 조운·무역에 활용
“고려국의 병선 수백 척이 쳐들어가 적(여진)을 치자, 적들은 힘을 다해 싸웠으나 고려군의 사나운 기세 앞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고려의 병선은 선체가 높고 크다. 무기가 많이 있어 배를 뒤집고 사람을 죽이자, 적들이 고려군의 용맹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고려선에 들어가 보니 이같이 넓고 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층으로 만들어져 상층에는 노가 좌우에 각각 4개가 있으며 노를 다루는 자가 4∼5명 정도 있었다. 병사 20여 명이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층에는 좌우에 각각 7∼8개의 노가 있다. 뱃머리는 적선과 충돌하여 깨부수기 위해 선체 바깥에 쇠로 만든 뿔이 있다. 선내에는 철갑옷과 크고 작은 칼과 갈퀴 등의 무기가 준비돼 있다. 적선에 던져 배를 깨부수기 위한 큰 돌(大石)들도 준비돼 있다.”(『小右記』(寬仁3년-1019년 8월)

뱃사공을 제외한 약 80명의 병사가 고려의 병선에 탄 모습이 실감나게 기록돼 있다. 참고로 1374년(공민왕23) 제주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거느린 부대가 배 315척에 2만5605명이라 한다. 척당 약 80명이 탄 셈이다. 조선 초기에 대형 전함의 정원 역시 80명이었다. 요컨대 고려 전기부터 이런 대형 전함을 제조했던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술이 발달한 배경은 뭘까. 고려왕조에선 개방정책 덕에 대외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해와 서해 항로와 한강 등 내륙 수운(水運)을 통해 전국의 조세를 수도 개경으로 거두어들이는 조운(漕運)제도를 실시한다. 또 동해안 지역은 해로를 이용한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다.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막기 위해 연해안 거점도시에 해상 방어관청인 도부서(都府署)를 설치한다. 이 과정에서 조운선과 전선 같은 선박 수요가 상당히 많았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조선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선 기술은 조선왕조로 계승돼 우리나라 전통 선박 한선(韓船)의 기원이 되었다. 그 가운데 고려의 군선(軍船)이 주목된다. 군선은 다른 배와 달리 뱃전에 짧은 창검(槍劍)을 빈틈없이 꽂아놓아 적이 배 안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과선(戈船)이라 부른 이유다. 이런 형태의 고려 전기 과선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 사이에 검선(劒船)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당시엔 구선(龜船·거북선) 제작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고려선 제작 기술은 이렇게 조선시대 중반까지 계승됐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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