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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곱게 미친 여인의 노래가 당기네

도니체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매드신을 연기하는 조앤 서덜랜드. [www.culturedviews.com]
당신은 누구인가? 금방 짧게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 말해보겠다. 당신은 산만신경계를 지녔다. 과민성대장 증상에 시달리며 틈틈이 공황발작을 일으키고 늘 만성피로증후군에 시달린다. 원인 모를 대사장애와 잦은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조기 치매 가능성이 예상되는 이상행동을 벌이고 두통, 북통, 신경통을 교대로 앓는 사람이다. 신장이나 췌장 혹은 대장 어디쯤에 악성 종양이 자라나고 있을지 모르고 어쩌면 희귀한 난치성 질환에 이미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詩人의 음악 읽기] 조앤 서덜랜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위로가 되시는가? 제약회사 광고에서 주워들은 병명을 이처럼 아무렇게나 나열해도 그중 몇 가지는 걸려든다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당신 아니 바로 나, 우리다. 우리는 온갖 질환을 탐닉하며 질환 직전에서 질환이 안겨주는 공포의 스릴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바람에 다들 약간씩 실성해 있다. 간혹 자기만은 태아처럼 깨끗하고 건강한 완전체라고 믿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중증이다. 심각한 질병을 목전에 두고 그나마 온전한 오늘 하루를 다행으로 여기며 연명하는 것. 그래, 그런 걸로 위로받는 심리를 ‘실성’이라고 부르자!

어떤 이유가 있어서 지금 실성한 음악을 찾아 듣는 중이다. 오페라 아리아 가운데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매드신 즉, 광란의 장면인데 아예 음반 타이틀로 묶여 나오는 경우도 많다. 그중 베스트셀러 음반으로 조앤 서덜랜드의 ‘매드 신즈(mad scenes)’가 아주 유명하다. 토마의 ‘햄릿’, 벨리니의 ‘청교도’, 마이어베어의 ‘디노라’ 속 매드신이 나오고 끝 곡으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가운데 광란의 아리아가 장장 19분 동안 불려진다.

오빠의 강요로 이루어진 정략결혼의 희생자 루치아. 결혼 첫날밤 신방에서 사랑하지 않는 신랑을 칼로 찔러 죽이고 피 묻은 잠옷 차림으로 피로연장에 나타나 길고 긴 하소연을 하다가 자결하는 대목이다. 피와 광기의 무대지만 음악은 그렇게 무시무시하지 않다. 차라리 아름답고 서정적이라고나 할까. 도니체티 오페라가 다 그렇지만 결이 곱고 예쁜, 드라마틱이 아닌 리릭의 노래다. 조앤 서덜랜드는 그리 고운 목소리의 성악가가 아닌데 루치아의 곱게 미친 상태를 표현하기에는 최적이 아닌가 싶다.

실성한 음악이 필요한 이유는 어떤 미드(미국 드라마) 때문이다. 당신은 꽤 심술궂고 난폭한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상상 초월로 아무 여자나 건드리고 남의 재물을 무슨 수단으로든 빼앗고 모든 합법적인 영역을 조롱하고 무시하는가. 친한 친구라도 이익에 배치되면 토막을 쳐 강물에 버리거나 땅에 묻어 버리거나… 그만하자. 그런 사람일 리가 없는 당신에게 미드 ‘소프라노스’를 권장한다. 이 세상에 나온 미드 가운데 가장 시청률이 높았고 수많은 상을 수상한 작품이니 재미는 틀림없다. 9년에 걸쳐 방영된 그 긴긴 스토리를 다 섭렵하려면 아마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토니 소프라노라는 이름의 마피아 중간 보스 이야기를 이미 본 사람이라면 대뜸 말할 것이다. 그거 무서운 드라마 아닌데? 끝없이 킬킬거리게 만드는 웃기고 유쾌한 이야긴데? 그리고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거 우리 사는 얘기와 너무도 닮았던데?
거의 모든 장면에서 하염없이 음식을 먹어대면서 주위 사람을 괴롭히는 주인공 토니 소프라노는 뚱뚱하고 못생긴,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애와 같다. 친척이든 친구든 이익에 배치되면 토막 쳐 물속에 버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거리감을 느끼기는커녕 ‘저 친구 어떤 면이 나를 너무 닮았어’라고 느낄 수밖에 없게 되는 절묘한 심리묘사들.

등장인물과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감정의 질서를 찾는 드라마를 비극이라고 부른다. ‘소프라노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이 가정생활인데 사악한 폭군과 비겁하고 나약한 소시민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주인공 토니의 모습이 낯선 것일까. 비극이 맞다. 그런데 비극은 그 배경으로 장엄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비극이기에는 너무도 코믹하고 또 일상적인 분위기의 드라마다. 그러면 희극인가. 아, 미드에서 왜 굳이 희비극 장르를 따지랴. 아마도 가볍게 즐기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심중한 작품성 때문일 것이다. 희극으로 속이고 있는 비극. 이쯤 정의하면 맞을 것도 같다.

우리는 모두 중증질환 직전의 환자들이다. 제법 실성한 상태로 살아간다. 그래야 위로가 된다. 악랄한 마피아 토니 소프라노는 저 멀리 존재하는 뒷골목 악당이 아니다. 희디흰 신부 옷에 피를 묻히고 광란의 아리아를 부르는 조앤 서덜랜드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토니 소프라노가 저지르는 행동의 배경음악이 된다.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과민성대장 증상이거나 공황발작이거나 만성피로증후군이거나… 그런 우리의 삶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쉴 새 없이 음식을 먹던 토니 역의 제임스 갠돌피니(작은 사진)는 올 6월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52세의 나이. 비극인가 희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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