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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규 칼럼] 책향기 빼앗아간 서점가 책들

천고마비(天高馬肥). 가을은 독서의 계절임을 알리는 전갈이다. ‘그래 가을이니까!’ 하고 서점을 갔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들고 하드 커버를 열어 잠깐 읽는다. 넓은 종이에 박힌 글자가 크고 줄 간격도 시원한데 이거 너무 휑한 거 아냐. 잠깐 사이 눈은 옆 페이지로 옮겨간다. 그런데 책값은 권당 1만3500원. 세 권이 한 질이니 4만원이다. 값도 은근히 부담 되고,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 듬성듬성 써도 되나, 예전엔 글이 참 빼곡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책을 손에서 놨다.

그러곤 집에 있는 예전 소설과 ‘엉성한 정도’를 비교했다. 먼저 박경리의 『토지』(1993~94년, 전 16권)를 『정글만리』와 쪽당 줄 수, 줄당 글자 수와 대조했다. 『토지』의 경우 쪽당 30줄, 줄당 글자는 최대 27자였고 『정글만리』는 쪽당 21줄, 줄당 최대 25자였다.

책 크기는 같은데 위아래 9줄이 적고, 좌우로는 줄당 평균 두 자가 덜하니 시원할 수밖에. 87년판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쪽당 34줄, 줄당 최대 29자다. 전체 글자 수를 대략 계산하니 『비명 … 』은 최대 6만4000여 자, 『정글만리』는 5만여 자였다. 복거일 작가가 두꺼운 한 권으로 만든 책을 조정래는 세 권으로 나눈 셈이다.

내친김에 이병주의 『지리산』(85년)부터 이문열의 『수호지』(91년), 톰 클랜시의 『적과 동지』(95년), 김훈의 『칼의 노래』(2003),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9),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2009),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2009), 이문열의 『불멸』(2010)도 뒤적였다. 확실히 요즘에 가까울수록 ‘시원한 편집’, 다시 말해 쪽당 글자 수는 적고 전체 쪽수는 늘면서 ‘찜찜한’ 가격이 붙는 게 대세였다. 재미난 현상도 발견했다. 『지리산』의 글자당 가격이 1원이라 한다면 2009년 『엄마를 부탁해』에선 5원으로 급등한 것이다. 왜 그렇게 올랐을까? 기본 통계가 엉성하기도 하고, 필자가 출판 전문가도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원한 편집’ 앞에 속마음은 오히려 안 시원했다. 유명 작가의 책이야 그래도 팔린다지만 그렇지 못한 책은 ‘비싸고 헐거운 책’이란 오명을 쓰면서 출판계 전체가 욕먹지 않을까. 안 그런 책도 있지 싶어 혹시나 하고 교보문고에 갔다 역시나 하고 말았다. 복거일의 『비명 … 』 2013년판이 87년판보다 쪽당 6줄, 줄당 2~3자씩 줄어들고, 책은 두 권으로 나뉘어 권당 1만1000원을 받고 있었다. 새 책도 아니고 26년 전 것을 이렇게 팔다니. 서점엔 ‘물에 불린 소설’ 천지란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바로 그래서 소설책을 산 지 오래고 예전 책을 다시 읽는 버릇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약간은 묵직하고 조금은 빡빡한 글을 천천히 읽는 게 좋은 구닥다리 세대여서 그럴지 모른다. 휙 읽은 다음 던지는 책은 싫어서다. 이런 독자의 논리에 출판사는 불만일 것이다. 물가도 올랐고, 주된 독서층이지만 인터넷에 익숙해 빡빡한 책을 꺼리는 젊은이들을 겨냥하니 그리 됐다 할 것이다. 그래도 ‘물 먹인 소’가 나쁘듯 ‘물 탄 책’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독자를 초대할 양이면 좀 더 창의적일 수 없을까. 예를 들어 아이패드나 휴대전화 크기의 신개념 문고판 같은 것 말이다. 오래전 지갑 얄팍한 이들에게 문고판은 지혜를 담은 착한 창고가 아니었던가. 공짜 콘텐트가 넘치는데 하드 커버로 모양을 낸들 성기고 값비싼 책에 손이 가겠나. 새롭고, 저렴하고, 알찬 신개념 문고판 같은 것이 나오면 젊은 독자의 손에 휴대전화 대신 그런 책이 놓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드라마나 게임에 물든 정신에 책 문화가 청량제처럼 스밀지 누가 아는가. 요컨대 참신한 생각으로 서점에 찌든 돈 냄새를 씻어내자는 얘기다. 적어도 가을엔 책향기[書香]가 흘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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