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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 공주대학교 공과대학 박상흡 교수

공주대학교 공과대학 박상흡 교수가 자신의 전공인 용접 일반 책자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했지만 가시밭길을 꽃길로 가꾼 장인이 있어 화제다. 국내 용접 기능인으로는 최고로 꼽히는 공주대학교 공과대학 박상흡(60) 교수. 넉넉한 웃음과 대학교수라는 명패 때문에 ‘고생’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 것 같지만 박 교수는 자수성가(自手成家)의 모범 답안 같은 사람이다.

박상흡 교수의 제자가 전기용접을 하는 모습.
박상흡 교수의 험난한 여정은 중학교를 막 졸업하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할 것도 없는 중산층에 속했던 박 교수는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공부도 썩 잘해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3남2녀의 많은 형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원하는 공부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대학 진학을 꿈꾸며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계획했던 박 교수 역시 어쩔 수 없이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천안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어요.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담임 선생님이 추천하는 용접을 배우게 됐죠. 그것이 용접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용접은 박 교수의 운명을 바꿔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박 교수는 용접을 배우면서도 그저 빨리 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신 속도로 기술을 연마하던 박 교수는 고교 3학년이던 1971년, 충남기능경기대회를 시작으로 전국기능경기대회, 실고생 기능경기대회 등 출전하는 모든 대회마다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의 건설산업을 이끌어갈 차세대 기능인으로 주목 받았다. 특히 다음 해인 1972년 포루투칼에서 열리는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할 국가대표로 발탁되며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기대에 부푼 박 교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포루투칼이 내전을 겪으면서 기능올림픽이 취소된 것이다.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요. 국제대회에서 메달만 따면 당장이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더 좌절했던 것 같아요. 어린 마음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일입니다.”

오랜 시간 꿈꿔온 일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자 박 교수는 곧바로 취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현대건설에 취직이 돼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학력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현실에 또 한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 대학이라도 다녀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직장 생활이 개인 사정을 봐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박 교수는 직장을 그만두고 야간 대학을 다니며 일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정수직업훈련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됐다. 그곳에서 12년을 근무한 박 교수는 낮에는 훈련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대학을 다니며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생활했다.

또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대학원까지 다니며 용접 기능장은 물론, 공학박사 학위까지 받으며 국내 용접 분야에서 최고의 기능인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던 일을 늘 한(恨)스럽게 생각했던 박 교수는 2005년 핀란드 국제기능올림픽 국가대표 감독 및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금메달을 품에 안으며 국위선양을 했다. 이 공로로 박 교수는 같은 해 11월 정부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다음 대회였던 일본 시즈오카 국제기능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며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국가대표 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사회에서 경험한 학력에 대한 편견은 생각보다 더 큰 상처가 됐어요. 그래서 다른 어떤 것도 쳐다볼 겨를 없이 배우는 일에만 집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강단에 서고 나니 그때서야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힘든 시기였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이뤘다고 생각한 박 교수에게 또 다른 고민이 찾아왔다. 박 교수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소중한 용접 기술이 3D 업종으로 전락하며 갈수록 인재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박 교수는 이 같은 사회현상을 극복하고 용접 기능인의 저변 확대를 위해 전국 용접기능경기대회를 제안해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특성화고등학교나 산업체 지도자들을 위해 용접 기술 협의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재능기부를 위해 충남기능선수회를 구성, 매년 지역의 오지마을을 돌며 경운기·예초기 수리, 가택 전기수리, 이·미용 봉사 등 다양한 봉사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글·사진=최진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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