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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예 기자의 '위기의 가족'] '쓰레기집 부부 전쟁'의 끝은

[사진 중앙포토]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 라지요. 오랜 부부싸움 끝에 자녀와도 등을 돌린 부부의 사연이 있습니다. 십여년 간 이어진 부모의 부부싸움을 보며 자란 자녀들에겐 깊은 마음의 상처가 남았습니다. 부부싸움엔 정말 왕도가 없는 것일까요. 사생활 보호를 위해 내용은 각색했습니다.



#그의 이야기



찰칵. 현관문을 열었다. 연구실에서 자다 속옷을 가지러 일주일 만에 집에 들어오는 길이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악취가 코를 찌른다. 시궁창 냄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나. 그래도 이렇게 심할 수가 없는데. 코를 부여잡고 불을 켰다. 한눈에 쓰레기로 가득 찬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먹다 남은 라면이 들러붙은 냄비, 고춧가루 범벅 김치 그릇, 과자봉지가 널브러져 있다. 거실은 그래도 양반이다. 부엌은 말 그대로 쓰레기장이다. 얼마나 뒀는지 음식물 쓰레기에선 구더기가 기어나온다. 쓰레기 더미를 발로 헤치며 안방 문을 열었다. 침대에 한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을 빼곤 여기도 여지없이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다. 목구멍까지 욕설이 치솟았지만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옷장에서 트렁크를 꺼내 옷을 쓸어담았다. ‘내 이 집구석에 다시 들어오나 봐라.’



집을 나오면서 감정이 복받쳤다. 한평생 어떻게 살아왔는데. 아내는 나더러 보란 듯이 집안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만들어놨다. 10년의 부부싸움. 아내와 나는 더 이상 돌아설 공간이 없는 듯하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내가 늦깎이 대학공부를 하던 20대 후반이었다. 가난한 농사꾼의의 맏아들이었던 나는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었다. 돈을 모아 대학공부를 시작하면서 어르신들의 소개로 은행에 다니던 5살 아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가난한 내 형편을 따뜻하게 감쌌다. 공부하는 내내 뒷바라지를 하며 딸과 아들을 낳아 키웠다. 결혼 후 12년 만에 박사학위를 땄을 때, 아내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내가 강단에 서게 되면서 아내의 희생에 보답해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부부싸움이 시작된 건 그로부터 2년 뒤였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시면서 간병인이 필요했다. 시골에선 어려우니 이참에 부모님을 모시자고 했다. 그렇게 부모님은 상경해 안방을 차지했다. 한동안 잘 참아내던 아내는 어머니와 부딪치기 시작했다. 아파트에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아버지 대소변 쓰레기를 현관문 앞에 뒀던 게 발단이었다.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어놓는 방식까지 어머님이 한평생 해오신 방법을 탐탁지 않아 했다. 부모님 문제로 언성이 높아지자, 부모님은 얼마 되지 않아 “나가 살겠다”고 하셨다. 말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내 손으로 편찮으신 부모님을 내친 셈이 됐다. 죄책감에 아내와 싸우는 일이 늘어났다. 아내는 부모님이 나가신 뒤로 월급을 꼬투리 삼아 싸움을 걸어왔다. “월급통장을 통째로 안 넘긴다.”라는 게 이유였다. 아내는 싸울 때마다 집을 어질러 놓았다. 처음엔 부엌 바닥에 음식물을 쌓아뒀다. 그러더니 냉장고를 쓰레기통처럼 만들어놨다. 그렇게 10년을 싸우면서 아내는 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지독하게 변해갔다.



#그녀의 이야기



면사포를 썼을 때가 내 나이 27살이었다. 은행원인 나는 당시로선 모자란 게 없었다. 남편은 가진 것은 없었지만 머리가 비상했다. 남편이 책만 붙잡고 산 12년 동안 나는 소녀가장처럼 살았다. 두 아이를 낳고도 직장에 나가면서도 돈 한푼 못 벌어다 주는 남편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따면 나도 어깨 위에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



남편이 학위를 받고 교단에 섰을 땐 뛸 듯이 기뻤다. 남편의 성공이기도 했지만, 내 인생의 승리이기도 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남편의 직업.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인생을 위해 내가 희생했던 10여 년을 보상받고 싶었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은행을 그만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저, 아이들 뒷바라지를 잘하는 엄마, 남편을 출근시켜주는 아내 노릇을 해보고 싶었다.



꿈이 무너진 건 시부모님의 등장이 계기가 됐다. 학생신분이었던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도 모자라 이제는 누워있는 아버님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시골생활에 익숙한 시부모님은 아파트 생활을 지겨워하셨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한참 공부에 신경을 써야 할 나이라서 시부모님이 나가 사시겠다는 걸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마치 내가 시부모님을 쫓아낸 것처럼 나를 몰아세웠다.



그 뒤로 싸움을 하게 된 건 돈 때문이었다. 월급을 내가 관리하지 못하게 하는 게 미심쩍었다. 연구실엔 늘 못 보던 기기들이 있었다. 생활비엔 인색했지만 자기에겐 씀씀이가 좋았다. 수백만 원에 달하는 책도 구입하고, 당시로선 귀하던 휴대용 복사기나 스캐너를 일본에서 직접 사들여 쓰기도 했다. 별도로 쌈짓돈을 관리하며 사고 싶은 물건은 펑펑 사면서도 아이들 옷이나 내 화장품 한번 사들고 들어온 적이 없는 남편은 밉상이었다.



처음부터 집안을 쓰레기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월급도 다 안 가져다주는 남편이 미워 처음엔 설거지 거리를 쌓아뒀다. 눈에 보이면 답답한 사람이 치우란 뜻이었는데, 남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번에 싸울 땐 음식물을 치우지 않았고, 냉장고를 엉망으로 해놨다.



남편과 싸움이 길어지면서 아이들과도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고등학교 3학년인 큰딸이 “대학을 안 가겠다. 대신 결혼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대학을 안 가고 결혼이라니. 나는 남편이 정색하고 아이를 말릴 줄 알았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하겠다는 딸아이를 그냥 내버려뒀다. 아들 역시 멀어졌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게 보기 싫다”며 아들은 군대에 가더니 제대를 하고선 방을 얻어 따로 나가 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집을 구했다고 했다. 아들에게 그런 목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추궁을 해보니 남편이 돈을 대줬다고 했다. 남편은 모자 사이마저 갈라놨다.



#법원의 판단은



별거에 들어간 남편은 아내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냈다. 부산가정법원은 이 부부에게 ‘이혼’을 판결했다. 법원은 오랜 부부싸움 끝에 이혼을 하게 된 부부에게 “노력하지 않은 부부”라는 평가를 내렸다. 먼저 월급 통장 관리를 맡기지 않은 데 불만이었던 아내를 위해 남편이 애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원은 “월급을 모두 공개하고 아내에게 전적으로 관리하게 하되 용돈을 받아쓰려고만 시도했어도 갈등은 한결 줄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현예 기자.
집안을 쓰레기장으로 만든 아내의 극단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시했다. 재판부는 “남편을 괴롭히기 위해 청소를 하지 않고 집을 쓰레기장처럼 만들고 남편과 자녀까지도 집에 들어가기 싫게 만들었다”며 아내에게 이혼의 책임을 물었다. 법원 관계자는 “부부싸움을 할 때 자녀를 위해서라도 제 3자의 시각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이혼과 자녀와의 관계단절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남편의 이혼 신청은 받아들였지만 남편의 주장처럼 위자료나 아내 명의로 된 집을 남편에게 넘기는 재산분할은 인정하지 않았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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