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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준은 재미, 그랬더니 오스트리아 10대 여성 경제인



1994년 1월 오스트리아 빈 근교에 대형 복합쇼핑센터 SCS(Shopping City Sud)가 문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신 5개월에 접어든 동양인 여성은 쇼핑센터 소개 전단지를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그해 10월 그는 이 쇼핑센터에 66㎡(약 20평)짜리 가게를 열었다. 이 ‘아카키코’라는 작은 일본식 초밥집을 오스트리아 1위 외식업체로 키운 전미자(56)씨 얘기다. 전북 부안의 작은 국밥집 9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1979년 간호사 자격증을 들고 처음 오스트리아 땅을 밟았다. 그러다 바다가 없는 오스트리아에서 날 생선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종업원 220명에 연매출 2100만 유로(약 300억원)를 올리며 2007년 하인츠 피셔 오스트리아 대통령 방한 때 경제인으로 동행하기도 했던 그의 성공기를 전화를 통해 들어봤다.

연매출 300억원 올리는 레스토랑 아카키코의 전미자 대표



“사실 전 생선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스트리아 빈 지역에서 초밥집 아카키코 13개 매장을 운영하는 전씨가 던진 말이다. 자신이 즐기지 않는 메뉴로 고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걸까. 더구나 날 생선을 먹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을 상대로. “싱싱한 생선회가 아니면 제가 먹을 수 없었어요. 손님들이 좋아할 만한 부위를 찾으려고 연어를 얼마나 먹었던지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습니다.” 전씨의 식성은 도리어 품질 좋은 제품을 고객에게 내놓는 검증 잣대가 됐다. 전씨는 거기에 한국인의 마음이 담긴 서비스를 보탰다.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계기는.



 “24세이던 79년에 예비 신랑이 유학 중이어서 오스트리아로 이민을 왔다. 이 나라에서 쓰는 독일어를 전혀 모른 채 해외 취업에 가장 좋다는 간호사 자격증만 한국에서 따왔다. 8개월간 학원에서 독일어 공부를 한 뒤 상류층 상대 양로원에 취업했다. 말도 서툰 동양 아가씨를 고령의 할머니들이 너그럽게 이해하며 잘 대해주셨다. 오늘 살아계셨던 분이 다음날 돌아가시는 것을 보게 되고 또 노력하면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점도 알게 된 시기여서 내가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게 된 계기였다.”



-간호사가 식당 주인으로 변신했는데.



 “결혼하고 첫째 딸을 낳을 때까지만 해도 간호사 일을 했는데 둘째 아들을 임신하고 불고기 전문 한식당을 열었다. 당시 남편의 누님이 하던 가게를 물려받았는데 장사가 잘됐다. 오스트리아 국민배우로 불리는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가 단골일 정도였다.”



-그렇게 잘되는 가게를 왜 닫았나.



 “둘째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헤어졌다. 이혼 후 가게까지 정리하게 됐다.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닫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 싶었다. 간호사를 다시 하다가 지금의 남편(오스트리아 국적 유대인 프리드랜더)을 만나면서 셋째를 낳고는 안경테 판매를 했다. 넷째를 임신하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오스트리아는 아이가 4명이면 정부 보조금이 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나온다. 하지만 일이 하고 싶었다. 넷째를 낳던 해 아카키코를 차렸다. 6월에 출산하고 10월에 가게 문을 열었는데 산후 조리고 뭐고 가게 오픈에 정신이 없었다. 젖이 퉁퉁 불고 앉아있을 틈도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아카키코 초밥 메뉴.
-왜 일본 초밥을 택했나.



 “한국 음식을 좋아하지만 복잡하고 유럽인들에게는 간이 좀 자극적이다. 동양 음식을 쉽고 깔끔하게 선보일 수 없을까 생각하다 초밥을 골랐다. 나는 정작 날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싱싱하고 맛있는 부위가 아니면 입에도 못 대겠더라. 내가 맛있으면 남도 맛있다고 판단해 개발한 메뉴들이 현지인에게 사랑을 받더라. 아카키코라는 상호가 일본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지만 아니다. 아이들도 발음하기 쉽고 일본어 같은 어감 때문에 초밥을 연상하도록 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 난 뭐든 재밌고 독특한 게 좋다.”



-작은 가게가 어떻게 손님들의 관심을 끌게 됐나.



 “어머니가 부안에서 국밥집을 했는데 쇠고기 뼈를 고아 만든 국밥 냄새가 지금도 떠오른다. 특별한 재료를 넣지도 않았지만 어린 내 눈에도 정성껏 만드는 게 느껴졌다. 음식 장사는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오스트리아에서도 깔끔하고 맛깔스럽고 친절하게 한다는 기본을 지켰다. 가게를 연 첫날 맛보기로 초밥과 김밥 하나씩을 공짜로 나눠줬다. 이틀째 되는 날부터 7개 테이블과 바 다섯 자리가 모두 차 기다리는 줄이 생겼다. 미안해서 차와 미소장국을 제공했는데 한국 사람 정서로는 당연한 것 아니냐.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극진한 서비스를 받은 것처럼 감동하더라.”



-분점을 계속 낼 수 있었던 비결은.



 “첫 점포 이후 2년 만에 빈 중심가에 3호점을 냈는데 입소문이 빠르게 나더라. 유럽에 배달 문화가 없었는데 우리 가게는 2000년부터 배달 시스템을 도입했다. 지금은 배달이 총 매출의 30%에 달할 정도다. 콜센터도 따로 둬 주방·배달·서빙·주문을 분리해 운영한다. 올 초에는 애플리케이션도 제작해 주문과 동시에 누가 만들고 누가 포장하고 누가 배달하는지를 고객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음식 실명제를 도입했다. 주문 후 3~5분이면 음식이 나오는데 한국에서야 빨리빨리가 당연하지만 유럽에선 ‘미리 만들어 둔 것 아니냐’고 의심을 할 정도로 놀라더라. 날 생선의 승부수는 신선함이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



-점포가 늘면 관리가 힘들어질 텐데.



 “주인이 없다고 맛이 변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돌아볼 수 있는 3시간 이내 거리에만 아카키코 점포를 늘렸다. 매일 불시에 3곳을 돌아본다. 몸은 힘들지만 손님이나 직원들과 만나는 것 자체가 큰 도움이 된다. 3~4년에 한 번씩 점포 내부 인테리어와 유니폼을 바꾼다. 단골이 많은데 아카키코는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는 이미지를 주려는 노력이다. 세계적인 호텔 체인 루이스 캐터린과도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었는데 그 기업 회장의 절친이 우리 3호점 단골손님이었다더라. 그가 ‘빈에 가면 가장 맛있는 초밥집이 있는데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그 집의 초밥 맛이 변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추천했다고 하더라.”



-맛을 꾸준하게 유지하는 방법이 있나.



 “모든 메뉴를 매뉴얼화했다. 예를 들어 재료별로 몇 cm로 자르는지, 몇 분 정도 데치는지, 양도 정해 놓고 반드시 지키도록 했다. 메뉴를 개발할 때는 직원들의 의사를 적극 반영한다. 직원은 또 다른 손님이다. 그들을 감동시킨다면 손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 베트남·필리핀·캄보디아 등 15개국 출신의 직원들에게 각 나라의 전통 음식이나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면서 유럽에 맞도록 개발한다. 10월에는 홍콩 출신 직원이 제안한 홍콩 스타일 초밥을 선보일 생각이다. 빈은 관광객이 많은 도시라 여러 나라 특색을 담은 메뉴가 중요하다.”



오스트리아 하인츠 피셔 대통령(왼쪽)으로부터 8월 28일 금성 훈장을 받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가운데)과 수여식에 초대된 전미자 대표. [사진 오스트리아 대통령실 Dragan Tatic/HBF]
-오스트리아 대통령과 함께 방한할 정도로 현지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대접받고 있나.



 “2007년 하인츠 피셔 대통령이 방한할 당시 공식 수행원단으로 함께 갔다. 그해부터 오스트리아 경제 잡지들이 선정하는 여성경제인 10인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하다. 빈 시가 주관하는 우수 여성 사업가상 선정위원 5명 중 일원이기도 하다. 35년간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한인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 5월 빈에 개관한 한인문화회관 초대 관장직을 맡았다. 한인이 똘똘 뭉쳐 일궈낸 일인데 문화회관 건립에 25억원가량이 들었다. 자체 모금과 한국 외교부의 도움으로 진행했다. 현지인을 위한 한국어 교실, 한국인을 위한 독일어 교실, 태권도, 한국 요리, 국악 콘서트, 결혼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직접 동양 한옥의 아름다움을 살려 건립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인회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관식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하인츠 피셔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참관했을 정도로 규모가 성대했다.”



전미자 대표의 4남매. 왼쪽부터 둘째 영웅, 넷째 나오미, 셋째 방울, 첫째 수잔. 수잔과 영웅은 한국인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방울이와 나오미는 오스트리아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 [사진 전미자]
-사업을 하며 4남매를 키우기 힘들지 않았나.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은 부모가 모두 한국계라 100% 동양인이다. 셋째 아들과 넷째 딸은 유대계 아빠와 한국계 엄마를 둔 혼혈이다. 늘 바쁜 엄마를 뒀지만 아이들끼리 사이가 굉장히 좋다. 워낙 다양한 민족이 사는 국가여서 셋째와 넷째는 별 문제가 없었다. 첫째와 둘째에게는 늘 ‘한국인의 긍지’에 대해 강조했다. ‘엄마는 외국에서 살고 가진 것도 없지만 한국인이란 긍지가 있다. 한국인은 똑똑한 민족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라’라고 늘 말해줬다. 중요한 것은 엄마가 자신감이 있어야 아이들도 주눅들지 않는다. 그래서 독일어도 굉장히 열심히 했다. 엄마는 독일어를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만 잘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엄마가 책을 많이 읽으면 아이들도 따라 읽는다. 둘째는 사춘기가 좀 일찍 와서 고생을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를 어떻게 지도했나.



 “둘째는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 수업 시간에 벌떡 일어나 창문 밖으로 물건을 던져 학교에 불려가기도 했다. 빈이 음악의 도시여서 둘째에게 10살 때부터 유명한 음악학원에 보내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런데 교수님이 ‘이렇게 연습 안 하는 아이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난 좋아서 계속 보냈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하기 싫은 걸 하려니 얼마나 고역이었겠나. 또 사립초등학교에 입학시켰더니 힘들어 하더라. 사립은 공부 양이 많고 아이들이 욕심도 많았다. 음악·체육·미술 등 잘해야 하는 것도 너무 많다. 아이의 특성을 생각하지 않고 엄마가 하고 싶은 걸 강요하면 안 된다. 뒤늦게 국립학교로 전학시켰더니 산만한 것도 사라지고 급기야 반에서 1등까지 하더라. 잔소리 대신 묵묵히 지켜봐 주고 늘 아이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랬구나. 네가 그래서 그런 행동을 했구나’라는 말 외에 다그침이나 훈육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마음이 아플 때는 동감해 주고 기다려 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나.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무리 바빠도 매일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직접 갈아 먹였다. 음식도 신선한 재료를 듬뿍 넣어 비빔밥이나 김밥을 해줬다. 유럽에서 사니 4명 모두 독일어와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하고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읽을 줄 안다. 한국어도 잘하는데 엄마와는 무조건 한국어로 말한다. 막내 나오미는 언니처럼 잘하지는 않지만 한국말을 다 이해한다. 그 덕분인지 첫째는 연세대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왔고, 둘째는 한국어를 한다는 점이 취업에 장점으로 작용했다. 고교 졸업 이후부터는 아이들 인생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이젠 자신들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건 지켜볼 뿐이다. 셋째가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s)를 졸업하고 브라질 무술에 심취했을 때도, 막내가 뉴욕대를 휴학하고 이탈리아 피렌체의 레스토랑에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도 난 그저 우리 아이들이 재밌게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고 생각해 기뻤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분야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김소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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