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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역사 깊은 흑산성당 가보니

흑산성당 산하에는 6개의 공소가 있다. 섬마다 성당을 둘 수 없어 흑산도에 있는 이준용 신부가 돌아가며 미사를 집전한다. 흑산도 앞 장도 공소 앞에 선 임송 선교사·이준용 신부·이충방 장도공소 회장(왼쪽부터).


1958년 건립된 흑산도 흑산성당 본당 건물.
“배가 치솟고 가라앉을 때마다, 의금부 형틀에서 매를 맞을 때, 하얗게 뒤집히던 고통이 다시 살아났다. 다시 배가 가라앉을 때 정약전은 의식을 잃었다.”

흑산 부둣가 홍어가게에
세례명 간판 많은 까닭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사를 다룬 소설가 김훈의 장편 『흑산』은 흑산도 가는 바닷길의 고통을 이처럼 묘사한다. 동생 약용 못지 않은 천재이자 이 땅의 첫 어류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1758∼1816)이 1801년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귀향 가는 장면이다. 소설가의 문장은 감정이입 없이 냉정하다. 그러나 약전의 고통은 실감난다. 오죽 바다가 요동쳤으면 형장의 괴로움이 되살아나 까무러쳤겠는가.



 200년이 흘렀지만 목포에서 흑산도 가는 86㎞ 바닷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파고가 2m만 넘어도 여객선은 급류에 떠다니는 나뭇잎 신세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흑산도에서는 천주교가 단단히 성장했다. 1958년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발을 들인 게 결정적인 계기다. 바다에만 의지해 살아야 하는 천형을 스스로 선택한 주민들은 앞다퉈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주민들에겐, 죽어서 가는 천국보다 당장 이생의 궁핍을 벗어나는 일이 절실했는지 모른다.



 26∼27일 흑산도를 찾았다. 2.5m 높이의 파도를 뚫고서다. 두 시간 뱃길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마침 올해는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한국에 들어온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섬은 가톨릭의 표지들로 가득하다. 부둣가 옆 수산물 가게에 들어가 홍어 시세를 묻다 가톨릭 취재차 왔다고 밝히자 주인 아주머니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바뀐다. 신자인 것이다. 요한수산·라파엘수산 등 간판에 세례명을 밝힌 가게도 여럿이다.



 섬에 들어온 지 3년째인 이준용(48) 신부는 “전체 섬 주민 4500여 명 중 1100여 명, 25%가 가톨릭 신자”라고 밝혔다. 흑산성당이 소속된 광주대교구에서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배교(背敎)해 목숨을 건진 약전은 흑산도 동남쪽 사리 마을에 정착해 복성재(復性齋)를 세웠다. 사악한 서학(西學·천주교)을 버리고 다시 성리학에 돌아간다는 뜻이다. 섬마을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이 신부를 도와 흑산의 가톨릭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임송(59) 선교사는 “자신의 조상 할아버지가 약전에게서 글 공부를 배웠다고 증언하는 촌로들이 아직도 있다”고 전했다. 약전을 배교자로 낙인 찍어 다루지 않는 공식 가톨릭사와는 달리 약전이 끝내 가톨릭을 버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외방선교회가 도착했을 때 섬에는 이미 가톨릭 신앙이 싹트고 있었다. 흑산도 출신인 영세자 조수덕(마리아)이 1951년 고향에 돌아와 전교 활동을 한 덕이다. 선교회 진요한(Sean Brazil) 신부는 발전소·조선소를 세워 주민들의 살 길을 찾았다. 밀가루·우유 등을 공급해 주민들을 긴급 구제하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흑산도는 모두 7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신앙공간인 공소(公所)가 6개다. 이준용 신부가 배를 타고 공소를 돌며 신자들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흑산도가 지척인 장도에서 공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충방(72)씨를 만났다. 장도 토박이로 10대 초반에 세례를 받았다는 그는 “죽어서 끝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천당에 간다는 진리를 깨닫고 진실하게 믿어 왔다”고 했다.



 삶의 고통은 신앙의 자양분이었다.



흑산도=글·사진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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