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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 못 견뎌 떠난 사람들 … 그들은 잘사는 대한민국을 열망했다

광부 출신의 황성봉 관장(왼쪽)과 김용길 독일 연방정부 가족부 공무원이 8월 31일 독일 에센시 한인문화회관(파독 광부 기념관)에 걸려 있는 광부들의 점심 식사 사진 장면을 어루만지고 있다. [에센=장세정 기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만난 카레이스키(고려인) 5세이자 시인 겸 소설가인 미하일 박(64). 그의 가족사는 곧 150년 이민사다. 그의 고조부는 1863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어업에 종사했다. 정착 70여 년 만인 1937년 조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국경지방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의 스파이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스탈린이 연해주에 있던 한인 약 20만 명을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토록 한 뒤 소련 시민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미하일 박은 49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다. 카자흐스탄에서 시인으로 등단한 뒤 98년 모스크바로 이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런 미하일 박의 딸은 지금 경기도 파주에 살고 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번성하면서 한국으로 유학했다가 한국인과 결혼했다. 이민 6세가 다시 조국으로 역이주한 것이다.

이민사에 얼룩진 시련과 애환
하와이 농장서 독립운동 일구고
독일 갱도에서 산업화의 꿈 캐
군사정권시절 민주화·인권운동도



 한민족의 이민사는 가난과 망국뿐 아니라 산업화·민주화 등 현대사의 굴곡과 부상이 골고루 투영돼 있는 거울이다.



 인천 월미도에 2008년 들어선 한국이민사박물관. 그곳에 가면 미하일 박의 조상과 같은 연해주 이민부터 하와이 공식 이민을 포함해 150년 이민사를 확인할 수 있다.



 1903년 첫 하와이 이민이 이뤄진 뒤 1905년 4월엔 1033명이 멕시코로 떠났다. 멕시코 이민은 말만 이민이었다. 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의 일종인 식물 에네켄(흔히 애니깽으로 불림)을 재배하는 사실상의 노예노동에 동원됐다. 그해 12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 빼앗기면서 해외 한인의 관할권은 일본 영사관에 넘어갔고, 멕시코 한인들은 사실상 버림받았다. 이들 중 288명은 1921년 쿠바로 다시 이민을 떠났다.



 일제 치하에선 조선인들의 일본 이주가 대거 이뤄졌다.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으로 인한 수탈 등으로 한국 땅에서 더 이상 살기 힘들어진 이들이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부관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 매년 8만~15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35년엔 62만 명을 넘었다. 38년부터 강제 징용, 강제 징병으로 수많은 한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들이 재일교포 1세를 형성했다. 재일동포 사회는 크게 올드카마(old-comer)와 뉴카마(new-comer)로 나뉜다. 올드카마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교포들의 후손을 가리킨다. 뉴카마는 80년대 여행 자유화 이후 본격화된 유학생과 기업인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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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엔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가 산업전사로 수만 명 파견됐다.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남미로는 농업이민을 떠났다. 63년부터 독일에 파견된 7936명의 광부들 중 수백 명은 3년 계약 기간이 끝나도 귀국하지 않고 미국·캐나다·영국 등지로 다시 이민길에 올랐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만난 파독산업전사 세계총연합회 고창원 회장은 “귀국해도 국내엔 배고픔만 기다릴 뿐이었다.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도전정신을 갖고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구촌 175개국에 정착한 재외동포들은 이런 개척정신으로 코리안·카레이스키·한궈런(韓國人)·차오센쭈(朝鮮族)·간코쿠진·코레아노 등으로 각기 살아남았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이산)’는 분명 불행한 역사와 밀접한 상관이 있지만 이들은 생존과 더불어 한국의 독립과 산업화·민주화에 기여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전영택씨는 1912년 7월 22일 피땀 흘려 모은 금화 5원을 하와이 현지 한인단체에 납부하고 영수증으로 ‘국민 의무 증서’를 받았다. 이런 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이 마련돼 임시정부 등에 전달됐다.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연구해온 재미동포 이덕희씨는 “한인 여성들이 무말랭이와 대구무침을 팔아 독립자금을 댔다. 지금도 하와이에선 대구무침을 토속음식으로 알 정도”라고 소개했다. 연해주와 북간도 이주민들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 시절엔 미국 등지에 있는 재외동포들이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장회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이런 재외동포들의 공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미국·중국·일본·러시아·카자흐스탄·독일)=장세정(팀장), 강인식·이소아·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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