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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돌아오지 못한 북파공작원 7726명





















①② 해병 관할 북파부대인 MIU 대원들의 해상침투 훈련.
③ MIU가 북한 해안에 상륙하는 실전 훈련.
④ 육군첩보부대 HID 요원들이 북파훈련을 위해 위장을 하고 무장을 갖췄다.
⑤ 북한 주요 시설 폭파후 탈출작전.
⑥ 항공기를 이용한 공중침투 훈련.
⑦ 특수무술 훈련은 인공기를 걸어둔 채 실시됐다.
⑧ 북한 보유 AN-2기를 이용한 대북 침투·교란 훈련인 ‘질풍작전’(2003년 10월)에 참여한 북파공작원.
⑨ 인민군복 차림에 북한 무기를 소지한 공작원들이 훈련 중 한자리에 모였다.
⑩ 야간 철조망 침투훈련. [사진 특수임무유공자회]


7726명의 돌아오지 못한 용사가 있다. 6·25전쟁 이후 계속된 남북 대치상황 속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렀던 그들은 북파공작원이라 불린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국가의 부름에 응했던 이들에게 돌아온 건 훈장이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트라우마였다. 비밀 엄수란 이유로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받은 이들이 아픈 과거를 기억해 달라며 입을 열었다. 국군 창설 65주년(10월 1일)을 맞아 북파공작원 문제를 돌아봤다.

1983년 10월 하순의 어느 날 새벽 서울 남산타워(현재 N서울타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건장한 청년 10여 명이 236m 높이 타워 벽면을 밧줄로 오르고 있었다. 기관단총을 걸쳐 메고 폭약이 가득 담긴 배낭을 짊어진 채였다. 삭발을 한 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북한 군복 차림이었다. 작전명 ‘벌초계획’. 같은 달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발생한 북한 정찰총국의 테러로 각료 등 17명의 한국인이 사망한 데 따른 응징·보복 공작 훈련이었다. 모든 걸 벌초하듯 제거해버리겠다는 정부 안보라인의 의지가 담긴 작전이었다. 평양 중앙방송 송신탑(높이 210m)과 대동강변 주체사상탑(170m) 폭파를 위한 실전 훈련장으로 남산타워가 꼽힌 것이다.

 훈련은 한 달여 뒤 전두환 대통령이 ‘대북 보복은 하지 말라’는 비밀지침을 하달하기까지 계속됐다. 당시 훈련에 참가했던 이시연 국민생활안보협회 공동대표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톱·발톱을 깎아 하얀 봉투에 넣고 유서까지 써놓았다”며 “실제 북파공작에 투입되면 살아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 비장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76년 8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발생한 북한군 도끼만행 사건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북한 경비병이 도끼로 미군 2명을 살해하고 한국 장병들을 부상하게 한 사태가 벌어져 한·미 군 당국은 물론 국민 감정까지 격앙되자 극비리에 보복 작전이 준비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미 양국 군의 강력한 대북 대응조치를 강조한 데 따른 움직임이었다. 코드네임 ‘황금박쥐’로 불린 이 공작은 평양으로 침투해 김일성 집무실이나 우상화 상징 시설을 폭파하고 고위 인사를 살해하는 게 핵심이었다. 제3국으로 은밀하게 이동해 해외 주재 북한 공관을 타격하고 대사 등에게 위해를 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특수훈련 시설 내에 김일성 집무실이나 북한 대사관을 그대로 본뜬 모형 건물을 세워놓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이 이뤄졌다. 전술핵과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미군의 위세에 눌린 김일성이 사과하면서 실제 행동은 보류됐다.

 북한의 주요 무력도발 때는 자위권 차원에서 빠짐없이 우리의 응징보복 계획이 수립됐다는 게 관계자 증언이다.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출동할 수 있는 태세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작전훈련에 참가한 요원들은 특전사나 해병 같은 대한민국 국군이 아니었다. 군번도 계급도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그들은 북파공작원이라 불렸다. 분단 이후부터 국가에 의해 비공개리에 양성된 북파공작원은 모두 1만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실제 작전에 투입됐고, 절반이 훨씬 넘는 7726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10년간의 베트남전 한국군 전사자 5000여 명보다 많은 숫자다.

30㎏ 배낭 야간행군, 뱀·들쥐로 연명

 북파공작 활동은 1968년 발생한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김신조 등 31명의 북한 무장병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를 위해 청와대 인근까지 왔다가, 종로경찰서장인 최규식 총경 등을 숨지게 하고 사살·생포됐다. 같은 해 10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북한의 도발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북한 특수부대를 능가할 대북 응징보복팀의 창설을 결정했다. 강원도 고성군 청간정(淸澗亭·관동 8경의 하나인 강원도 유형문화재) 인근에 자리 잡은 설악개발단은 그 산실이 됐다. 5·16 뒤 조폭이나 깡패들을 잡아들여 교화훈련을 시키던 ‘국토개발단’을 인수해 68년 초 북파공작원 훈련기관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북파공작원 선발과 양성 작업에도 박차가 가해졌다. ‘물색관’이라고 불린 현역 군 간부나 병무 담당 요원들이 전국을 누볐다. 신체 건강하고 환경이 어려운 고교생이나 20대 초반 청년들이 타깃이 됐다. “김일성의 목을 따는 특수부대가 생긴다. 죽으면 집안을 일으키고, 살아 돌아오면 거액을 챙길 수 있다”는 제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젊은이들에게는 솔깃한 것이었다. 검은 지프를 타고 나타난 물색관이 제시한 보상은 5~7급 공무원 자리와 보상금 500만~1000만원. 당시 서울 시내 일반 주택 한 채가 200만원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북파공작원 단체인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이남진 관리위원장은 “생계조차 어려워 군 입대를 위해 찾은 징병검사장에서 물색관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며 “나 한 사람 죽어 가족이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선뜻 지원서약서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훈련은 혹독했다. 기초체력 단련을 위해 30㎏의 모래배낭을 메고 양 발목에도 각 5㎏의 사낭(모래주머니)이 채워졌다. 야간행군을 포함해 시간당 13㎞를 주파해야 했다. 북한 특수부대보다 앞서는 게 당면 목표였다. 이전 기록보다 떨어질 경우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죽기살기로 뛰고 구르다 보면 등은 피범벅이 됐고 고름은 말라붙어 굳은살로 변했다. 철조망과 철책, 부비트랩과 함정·사막지대 등 휴전선의 6중 봉쇄를 뚫고 침투하는 방법도 반드시 익혀야 할 숙제였다.

 안전시설이 제대로 마련돼 있을 리 없었다. 사고로 훈련생이 죽거나 다쳐도 책임을 묻지 않는 무법지대였다. 30m 낭떠러지 위에서 밧줄을 타는데도 안전끈 하나 없었다. 북파공작이란 특수성 때문인지 극한의 조건에서 생존하는 훈련도 강도 높게 받아야 했다. 특히 홀로 산악지대에서 장기 은닉하며 뱀이나 들쥐 등을 잡아먹고 연명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임무 수행을 위해 세 차례 북한을 다녀왔다는 A씨는 “인권 운운하는 건 우리에겐 사치였다”고 회고했다.

 10개월 정도의 고된 특수훈련을 마친 뒤에 북파 명령이 떨어졌다. 첩보 수집의 경우 단독 또는 2인 1조를 이뤄 휴전선을 뚫고 들어가 북한군의 새로운 시설이나 장비를 촬영하거나 관측하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군 관계자는 “위성사진 등을 통한 정보 수집이 없거나 초보 단계이던 1960~70년대는 직접 현지에 침투해 사진을 촬영해오는 임무가 많았다”며 “미군도 우리의 이런 정보 수집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고 귀띔했다.

 무장 임무는 10~20명의 팀이 들어가 주요 시설을 폭파하거나 노동당이나 군부의 고위 인사를 테러하는 게 핵심이었다. 물론 생포 시 보안을 위해 군번이나 계급은 없었다. 복장은 북한 군복이었고 북한제 소총을 휴대하거나 우리 소총의 경우 총번(고유번호)을 제거한 상태였다. 휴전선을 뚫고 지뢰밭 지대 등을 돌파하거나 ‘뗀마’라 불리는 9인승 목선을 타고 은밀하게 들어갔다. 익명을 요구한 퇴임 베테랑 북파공작원 S씨는 “6·25 종전 직후에는 북한군 초청으로 판문점이나 전방부대를 방문하는 중공(현 중국)이나 소련군 간부를 직접 폭발물을 설치해 타격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군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북한과 우방의 군사 교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이다. 그는 “선제공격보다는 북한의 도발에 대한 응징 차원의 작전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임무 수행 후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침투작전은 있었지만 복귀작전은 제대로 없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북파공작 팀장을 지낸 이시연 공동대표는 “폭파·살해 등의 임무로 소란이 일어나면 휴전선이나 해안의 경계가 강화되기 때문에 이를 돌파하고 돌아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는 긴장이 풀려버리는 점도 위험 요소라고 했다.

 부상한 채 휴전선으로 귀환하다 비무장지대 내에서 숨져 동료들이 임시 매장해 놓는 안타까운 경우도 적지 않다. 몇 해 전엔 그중 한 구의 유해가 수습됐다. 그런데 양쪽 발 부분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발목지뢰에 잘려나갔기 때문이었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폭발물에 손가락을 잃은 박상수 특수임무유공자회 감사는 “손가락이 잘려나간 손을 추슬러 철책을 넘어 귀환했지만 긴급후송된 군 병원에서는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군인이란 걸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북한 군복 차림으로 나타난 우리 팀장이 권총을 꺼내 군의관을 위협해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군에 사살된 경우 시신을 돌려받을 수도 없었다. 북한은 군사정전위를 통해 ‘남측 인원이니 송환하겠다’고 집요하게 제안해왔다. 하지만 우리 정부 입장에선 시신 송환은 곧 상황을 인정하는 셈이 됐다. 군 관계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북측의 자작극”이라며 떠넘겨야 했다.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사살된 공비나 남파공작원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건 북한도 마찬가지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일했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건 멸시와 편견뿐이었다. 북파공작원은 사형수나 무기수를 훈련시켜 써먹는다는 소문은 이들을 괴롭혔다. 제대로 취업이 될 리 없었다. 친구나 이웃도 이들을 피했다. 이성길 특수임무유공자회 사무총장은 “뭘 믿고 사형수·무기수를 북한에 보내겠느냐”며 “북파 뒤 북한군에 투항할 우려나 국가관 등을 고려하면 이런 사람들을 북에 보낸다는 건 현실성 없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모나 형제가 없는 신체 건강한 독신 남성이 주 대상이 됐다고 한다.

 퇴임 후엔 보안 담당 형사가 3개월에 한 번씩 찾아와 동태를 파악해 갔고, 보안유지 등에 협조하라고 협박하기 일쑤였다. 해외여행이 금지된 건 물론 여권에도 붉은 줄이 그어졌다.

 병마와 생활고가 이들을 덮쳤다. 일곱 차례 정도 북파공작을 수행했다는 팀장 출신 N씨는 “함께 퇴임한 동료를 얼마 전 찾았더니 쪽방촌에서 심한 알코올 중독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더라”며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김일성 만세’를 부르며 소리를 질러댔다”고 전했다. 극도의 긴장 속에 남북을 오가야 했던 젊은 시절의 쉽게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란 얘기다.

2000년대에도 AN-2기 이용 침투 훈련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북파 형식의 대북 특수임무 수행은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요원 양성과 비공개적인 특수활동은 상당 기간 계속됐다. 2000년대 들어서도 AN-2기를 이용한 대북 침투 훈련이 이뤄졌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북한이 대남 침투용으로 보유한 이후 우리 군도 교란작전 등 대응을 위해 비밀리에 도입해 운용 중이란 설명이다. 2004년에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보상이 추진됐다. 그런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잊힌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관련 단체의 지적이다. 가족이 북파공작·훈련 참가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당사자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수행했던 임무에 대해 털어놓기를 꺼린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절대 비밀을 유지한다는 보안서약을 지키려는 생각에서다. 북파공작 훈련을 받은 부친으로부터 숨지기 직전에야 관련 사실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는 백승민씨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말없이 소주를 들이켜며 먼 산만 바라보시던 아버님의 고독과 아픔을 이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90년대 말까지도 국가 비상사태 때마다 소집명령을 받았다. 74년 8월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나 96년 9월 강릉 잠수정 침투 사건 등이다. 아직도 소집명령에 대한 해제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대부분 60~70대 나이인 북파공작원 출신들은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8000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일에 대해 국가가 제대로 된 공적평가를 해달라는 주문이다.

 공적에 합당한 훈·포장 수여와 함께 조국을 위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추모묘역이나 공원 조성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790여 명이 숨진 4·19 혁명은 9만6837(약 3만 평), 4090여 명이 사망한 5·18 민주유공자의 경우 16만6734(약 5만 평)의 국립묘지가 조성돼 있다. 국방부는 전사자의 공적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곤란하고, 6·25와 베트남전·학도병 등과의 형평성 문제 등을 제기하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은 2008년 1월 특수임무유공자회를 결성했다. 추모공원 건립과 서훈 등 숙원사업 외에 유해 발굴, 재난 구조 등 사회공헌 사업도 벌이고 있다. 그들은 ‘나는 오늘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를 활동 모토로 하고 있다. 국가는 그들을 잊었지만 영원한 현역으로서 조국을 위한 헌신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7726명의 동료들이 모두 돌아오기 전까지 전쟁은 결코 끝난 게 아니다”라고.

김희수 특수임무유공자회장
"1969년 사망한 요원 2002년에야 전사 통지
가스통 시위, 억울한 마음서 나온 거친 행동"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과 매일 아침 이곳에서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혼자 살아남아 미안하다고. 그리고 즉각 무사귀환하라고.”

 김희수(61) 특수임무유공자회장은 미귀환 북파공작원 7726명의 이름이 빼곡히 담긴 검은 대리석 명패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보였다. 서울 녹번동 유공자회 내부 추모시설에서 만난 김 회장은 “북파공작과 관련한 모든 건 기억하지 말 것을 강요받은 우리가 이젠 그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름 위에 태극마크가 붙여진 명패가 눈에 띈다. 뭔가 구별하기 위한 것 같은데.

 “2004년부터 국군정보사령부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유가족 찾기를 해왔다. 8000명 가까운 사망·실종자 중 800명 정도만 가족·친지를 찾았고, 그분들을 태극 표시해둔 것이다.”

 - 임무 수행 중 전사했는데 가족에게 즉각 통지되지 않았다는 건가.

 “1969년 사망한 요원이 2002년에야 전사 통지를 받았다. 군 당국이 등기우편으로 달랑 보냈다. 80대 고령인 부친이 사망신고를 하러 갔더니 면사무소 직원이 과태료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한을 품고 있는 유족들에게 두 번 상처를 준 것이다.”

 - 어떻게 북파공작원에 선발됐나.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벌어진 지 두 달이 지난 68년 3월 물색관의 제안에 응했다. 고등학고 1학년이니까 16세였다. 5급 공무원을 시켜주고 당시 돈으로 500만원도 준다는 제안에 선뜻 응했지만 71년 전역 때 겨우 3만원만 받았다.”

 - 집무실에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진을 놓아둔 건 뜻밖이다.

 “다들 우리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원망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더라. 하지만 우린 그분을 존경한다. 고인께서 다시 살아와서 명령한다면 우린 또 북으로 갈 것이다. 남북 대결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 국가를 위해 희생했는데 잊혔다는 서운함은 없나.

 “최근 이석기 사태 등 종북세력의 행태를 보면 걱정이 크다. 그들에게 막대한 국민 세금이 지원됐다는 점도 문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부터 앞장설 것이다.”

 - 북파공작원 하면 광화문 사거리에 모여 가스통에 불을 붙인 채 과격시위를 벌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과격·폭력 이미지로 비쳤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젊음을 다 바쳐서 희생한 데 대해 국가가 외면하자 욱하는 마음에서 거친 행동을 한 것으로 이해해 달라.”

 - 지금도 유사시를 대비한 특수부대를 운용 중이라던데.

 “과거와 같은 일이야 가능하겠나. 얼마 전 우리 후배들이라 할 수 있는 특수정보부사관들이 근무하는 부대를 방문했다. 60대1의 경쟁률에 3개 국어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 우리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시설과 지원이 이뤄지는 걸 보고 가슴 뿌듯했다.”

 - 군 당국은 북파공작원 위령탑은 이미 건립됐다는 입장인데.

 “판교 정보사 교육단 영내 쓰레기 소각장터 옆에 충혼탑이 세워졌다. 부내 내에 있어 유족과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 단위부대장이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국립현충원 등으로 옮기거나 새로 건립해 국방부 등이 관리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이들을 예우해야 우리 후세들도 나라가 어려울 때 기꺼이 나서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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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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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