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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에 목 매지 말라, 상처가 우릴 자유롭게 한다

이 시대 대표적인 비판적 사상가로 꼽히는 슬라보이 지제크. 지제크는 2005년 영국 ‘더 프로스 펙트’와 미국 ‘포린 폴리시’가 선정한 100대 지식인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플라톤아카데미]
“요즘 한국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처를 치유(힐링)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든 결국 치유돼야 하는 상처(트라우마)이지만, 상처는 우리를 자유롭게도 합니다.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64)가 힐링 열풍에 휩싸인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다. 지제크는 24일 경희대와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가 공동 주최한 ‘나는 누구인가’ 강연에서 “상처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다. 상처를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꼽히는 지제크는 이날 강연에서도 남다른 파워를 과시했다. 대학생부터 60~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청중 3500여 명이 빼곡히 자리를 메운 가운데 2시간 동안 우렁찬 목소리로 강연을 이끌었다. 강연에 이은 질의응답 시간에도 끊임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두 얼굴의 한국사회=지제크는 한국 사회에 대해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을 갖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개인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소셜네트트워크서비스(SNS) 등 디지털 기기에 의해 강력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비해 많은 것들이 개선됐음에도 한국은 아직 여느 국가보다 자살률이 높다. 과도한 경쟁과 고용 취약 때문에 한국인의 일상생활은 물론 감성의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지제크는 후기자본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도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는 전세계에서 다 적용이 되고 있지만 이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며 “하나의 글로벌한 자본주의 세계관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일부 무슬림 국가에서 어떤 보호막도 없이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나타난 부작용이 바로 근본주의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로부터 자신들의 종교와 신념을 지키려는 몸부림이 정신병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로 나타났다고 풀이했다.

24일 밤 서울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지제크의 강연에는 3500여 청중이 참석했다.
 ◆전체주의 경계, 공적 영역 존중=지제크는 현대 사회의 큰 문제로 공적 영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 쉬운 예로 자신의 나체 사진을 웹에 올리는 사람들을 들 수 있습니다. 수백만 명이 온라인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데, 그 온라인을 사적인 영역으로 여기는 것이죠.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은 프라이버시가 아니라 이러한 공적 영역입니다.”

 지제크는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를 비롯, 에드워드 스노든·첼시 메닝 등 ‘내부고발자’들을 거명하며 “디지털화로 인해 공적인 공간이 사유화 돼 가고 있다는 걸 그들이 일깨웠다”고 주장했다.

 ◆지식인과 전문가의 경계=지제크는 또 철학을 홀대하는 지적 풍조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요즘 실용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철학자를 무용한 일을 하는 사람들로 여긴다. 전문가와 지식인의 역할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전문가 야만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전문가의 역할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정의해놓은 문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이다. 장기적으로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들려 한다면 지금 당장 쓸모 없어 보이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희대와 플라톤 아카데미의 무료강연 ‘나는 누구인가’는 11월 25일까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된다. 대중철학자 강신주(10월 8일), 『정글만리』의 작가 조정래(10월 15일), 『개미』 『신』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11월 17일) 등이 대중과 만난다. 참가 신청은 플라톤 아카데미 홈페이지(platonacademy.org)에서 받는다. 

이은주 기자

◆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사회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정치이론, 영화이론, 정신분석학 등을 아우른다. 미 시카고대, 컬럼비아대, 프린스턴대, 뉴욕대, 런던대 버베크칼리지 교환 교수 역임. 경희대 에미넌트 스칼라(Eminent Scholar·ES). 저서 『멈춰라 생각하라』『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헤겔 레스토랑』『라캉 카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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