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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대법원, 공부 좀 하시죠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1980년대 중반 미국 대학원 세미나실, 복지국가론의 대가로 알려진 교수가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후진국 청년이 어눌하게 물었다. ‘공공복지와 기업복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고. 미국과 유럽 전문가인 그 교수가 일본과 한국의 기업복지에는 문외한이었다. 기업은 복지의 주체가 결코 아닌 서구식 전통에서 난처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 덕에 나는 괜히 한국의 기업복지를 발표하라는 숙제를 부여받았다.



 지난 5일 통상임금 산정 기준을 찾는 대법원 전원합의 공개변론에서 대법관들은 오랜만에 공부 좀 했을 거다. 사안은 법적 잣대만으론 풀리지 않는다. 법원 판결이 서로 상충적이므로 대법원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법원장이 물었다. ‘왜 지금에 와서 문제 삼는가?’ 노동 측의 답변은 동정심을 유발했다.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는지 몰랐어요!’ 그러니 늦었더라도 몽땅 달라는 말이다. 일률, 고정, 정기라는 임금 규정 자구(字句)에 포박된 법관의 눈으로는 노동의 손을 들어줘야 했던 거다. 노동분배율이 날로 악화되는 마당에 어떠랴. 그런데 잠깐, 자구에 매달리면 어렵게 쌓아온 한국의 미덕과 잔솔 불처럼 남아 있는 노사 합의 정신이 여지없이 망가진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에 없는 산업적 온정주의로 이만큼 커온 나라다.



 한국 기업은 국가를 대신해 복지를 제공한 주체였다. 노동자의 생활 설계와 재산 형성까지를 봐준 기업 전통을 그 교수는 한국의 미덕(Korean Virtue)이라 칭송했다. 노동자들은 생산성 향상으로 보답했다. 그 덕에 집도 샀고 자녀들을 대학에도 보냈다. 서양의 연봉 개념에 주택, 학자금, 가족수당 명목은 없다. 한국의 임금제도는 유별나다. 모든 기업이 임금표를 갖고 있는데 시급(時給)에 기초한 기본급이다. 이것으로 각종 수당과 퇴직금을 산정한다. 기본급 70%, 각종 수당 20%, 연장노동 10%가 87년 이전까지 구성비율이었는데 노동자 대투쟁 이후 ‘수당’ 비중이 30%로 급증했다. 국가의 임금억제정책에 맞춰 수당 신설이 노사분쟁의 해결책이었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528개 기업현황을 조사한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1995) 놀랍게도 기업이 제공한 복지 종류는 55가지였다. 근로기준법에 명시한 법정복지 15개, 임의적 비법정복지 40개였다. 모두 일률, 고정,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혜택이었다. 영세기업은 엄두도 못 냈다. 대기업에서 복지가 급증한 이유는 명백하다.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이 분리된 한국에서 기본급 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상여금과 수당으로 보전하고자 했다. 노사 담합의 결과였다. 대우조선해양·현대차·삼성중공업·한국GM 등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한 기업의 숨은 스토리가 그렇다.



 기업주가 임의로 주는 비법정복지는 산업적 온정주의가 낳은 좋은 관행이다. 생산 장려, 노사 안정, 생활 설계, 노동력 확보 등을 고려한 시혜(施惠)의 일종이고 과격한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대체 수단이었다. 울산·창원 같은 산업도시를 상생의 공동체문화로 발전시키자는 협력적 의도가 명절 상여금, 휴가비, 학자금, 전·월세 자금 대여 등 현금 보상을 위시해 병원, 사원주택, 휴양시설, 체육관, 소비조합 등 시설복지까지 진화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근로 보상 총액이 통상임금’이라는 소송이 제기됐다. 근로기준법 ‘임금’ 조항에서 ‘근로의 대가’를 넓게 해석한 법원은 그게 맞다고 응답했다. 한국의 산업발전사와 노사의 눈물겨운 행보를 짓밟는 무지의 소치다. 대법원, 역사 공부가 필요하다.



 폭풍의 핵인 상여금은 무엇인가? 상여금은 생산성 기여분, 직무 헌신 장려, 생활 안정 지원이란 세 가지 기능의 총액이다. 생산성은 노동자의 몫이고 직무 헌신과 생활 안정은 시혜, 즉 기업복지다. 이것도 영업이익과 경기 변동에 따라 달라진다. 온정주의를 버리고 냉정하게 측정하면 상여금의 3분의 1, 즉 생산성 기여분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 그래서 근로 보상에 해당하는 통상임금은 ‘기본급+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법정복지+1/3 상여금’이다. 임의적 수당들은 제외다. 그런데 민주당은 ‘사전에 지급하기로 한 금품 일체’를, 정의당은 ‘정기적으로 지급된 모든 보상’을 통상임금이라 역설했다. 담합 당사자인 상층 정규직 노동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면 결국 노동 양극화와 산업 붕괴가 심화될 위험은 왜 애써 감추는 것일까.



 기업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모든 후생복지를 걷어 들이고 상여금에서 온정적 시혜분을 제할 것이다. 시급에 기초한 냉정한 월급제, 우리가 이걸 원하는가? 아직 노사 합의로 통상임금을 정하는 자율적 기업이 70%를 넘는다. 산업 미래가 달린 이 문제, 대법원에만 맡기지 말고 공론장의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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