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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혼외자식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엊그제 추석날 아침. 밤새 만들어 놓은 녹두전이며 불고기며 빨간 게장무침까지 비닐봉투에 넣고 통에 담고 포일로 싸서 커다란 배낭에 넣었다. 시댁 가서 추석 아침상 차릴 음식들이다. 텔레비전 방송에선 교통정체 구간을 보도한답시고 아침 내내 분주하다. 한복 차림의 앵커들까지 민족 대이동 운운하며 명절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우린 시댁이 서울이라 다행이다. 차를 집에 두고 음식이 잔뜩 들어 있는 배낭을 남편과 나눠 메고는 지하철을 탔다. 차례를 치르는 대신에 식구들이 먹을 음식만을 장만해 추석을 쇠기 시작한 지 올해로 만 3년째. 며칠 동안 음식을 장만하느라 허리가 부러질 듯 아팠던 육체적 고통과, 동서들끼리 오가던 알력이나 다툼 같은 정신적 고통은 많이 사라졌지만 명절이 조금은 심심도 하고 싱겁기도 하다. 도착하니 다들 왁자지껄 말이 많다. 대화가 정치 얘기로 넘어가더니 마침내는 모 총장의 혼외자식 얘기가 나왔다.



 혼외자식. 갑자기 예전 어떤 여자 생각이 났다. 사진 일을 하던 시절. 삼십 후반 나이의 외모도 출중하고 사업 수완도 뛰어난 한 젊은 여성 사업가의 사진 일을 마무리해 주고 만난 그녀와의 술좌석. 내 작업이 맘에 든다기에 답례 인사랍시고 ‘좋다는 남자가 줄을 섰을 것 같은데 왜 결혼하지 않는지’ 물었다.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데 애는 낳아 키우고 싶네요’. 신경 안 써도 될 좋은 남자도 많을 텐데 일단 결혼부터 해보고 애 생기면 낳고, 그때 가서 싫으면 헤어져도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싱글로 애를 낳겠다니 복잡해질 훗날이 걱정되어 한 말이다. 내게 건넨 그녀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쉬잇. 지금 좋은 학벌에다 좋은 인물을 가진 남자랑 사귀고 있어요. 근데 그 사람 애를 가지려고 노력 중이에요. 애만 생기면 그 남자랑 헤어져서 몰래 혼자 애 키우며 살 거예요’. 그 당시 그 둘이 부적절한 관계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상대 남자 모르게 임신해서 똑똑하고 인물 좋은 아이를 낳아 자기가 세상에 나온 흔적만은 꼭 남기고 싶다는 그녀. 그 후로 그녀를 다시 만난 일은 없다. 애를 가졌는지 낳았는지 키우고 있는지. 뒷얘기도 모른다. 기증자도 많고 찾는 사람도 많아 날이 갈수록 활성화되고 있다는 미국의 정자은행. 그곳에 기증된 정자의 주인들 중에는 명문대학 출신이 많단다. 결혼은 싫지만 똑똑한 애는 하나 낳아 키우고 싶어 하는 ‘골드미스’들이 주 고객이라 한다.



 이럴 경우엔 평생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사랑을 통해 얻은 결실도 아니다. 살아가면서 애가 아빠를 궁금해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뿐, 그다지 복잡해질 일도 없을 거다. 거리에서 판에 찍어 놓은 듯 자기를 닮은 사람을 만났다 하더라도 ‘혹시?’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지나가면 끝일 터이니 말이다.



 첩을 두 명이나 거느리고 있는 작은 기업체 사장. 그 바람둥이 사장과 첩들과 그 첩들이 낳은 자식들이 기업체 승계를 놓고 벌이는 얘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있다. ‘요즘 세상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얘기’라 하면서도 묘한 중독성이 있는지 계속 보게 만드는 드라마. 어찌 보면 ‘요즘 세상이기에 더 말이 되는 얘기’일지 모른다. 드라마에서는 부적절한 관계임을 알면서도 자식을 낳거나 상대가 유부남인 줄 모르고 속아서 자식을 낳거나. 다 혼외자식들이다. 낳자마자 그녀들은 자식을 미끼로 한자리 얻고자 늘 싸움질이다.



 죽을 때까지 남자 모르게 조용히 애 낳아 키울 거라던, 예전에 만났던 그 젊은 여자 사업가는 만약 그 애 아빠가 명사가 돼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자리까지 올라갔다면? 커 가면서 끊임없이 아빠를 궁금해 하는 자식에게 ‘이분이 네 아빠다’ 한다거나, 성공한 옛 애인을 찾아가서 ‘이 아이가 당신 아이다’ 하는 깜짝 이벤트. 과연 영원히 없을라나. 사랑하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여자가 사라졌다? 어쩌면 세상 어디엔가 자기 자식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명인사’ 되는 것이 꿈인 남자들. 몸 간수 잘해야 될 거다.



 정확한 유전자 식별이 가능한 세상에, 내 자식 아니라고 발을 뺄 수도, 시침을 뗄 수도 없지 않겠는가.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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