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해방에서 환국까지 |김을한

순종황후 윤 대비가 승하하신지 1년 뒤인 1967년에는 영친왕의 혼약자였던 만년규수 민갑완 여사가 73세를 일기로 동래 우거에서 별세하였다. 이로써 영친왕과는 가장 인연이 깊고 가까운 두 여인이 다 같이 전후해서 세상을 떠난 셈인데 영친왕은 그런 것도 전혀 모르고 다만 병상에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고 계셨으니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차라리 행복하다고 할까? 생각하면 눈물겨운 일이었다. 1970년은 영친왕이 방자부인과 결혼한지 만 50년이 되므로 지난 4월 28일에는 이를 기념하는 금혼축하 만찬회가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관에서 개최되었었다.

그날의 「금혼식」에는 63년 11월 22일 귀국이래 6년 반 동안이나 뇌출혈으로 줄곧 입원중인 영친왕은 물론 참석하지 못하였고, 다만 방자 부인과 아들 구씨 내외와 방자 부인이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법인 명휘원의 관계자들만 참석하였는데 명휘원 어린이들이 부르는「혼인찬미」와 「주의 옷깃을 만져 병 고침 원함」이라는 「찬송가」가 구슬프게 들려서 파란이 중첩했던 지난 50년의 세월을 되새기는 듯 하였다.

별세하기 4일전에 YMCA서 금혼식|1907년 회관건립 때 초석에 친필 새겨

그런데 서울 종로에 있는 YMCA과 영친왕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으니 그 내력은 이러하다.,

당시 황성 기독교청년회는 1903년에 창설되었고, 1907년(광무11년)에 신축하였는데 그것은 그때 YMCA의 지도자로 세계적으로 유명하였던 미국인 「목덕」박사의 주선으로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메카」씨가 막대한 기부를 하고 국내에서도 내장원경 현흥택씨(전YMCA총무·현동완씨의 백부)가 종로의 광대한 토지를 회관기지로 제공한 때문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황성 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던 1903년에는 일·로 양국의 극동에 있어서의 대립항쟁이 격화해서 1900년에는 노·일 간에 한국 영세중립론이 대두되더니 1902년에는 일·영 동맹이 성립하고, 1903년에는 다시 일·로 양국간에 북위 39도선으로 양단 할 계획이 진행되어 한국의 운명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이 위험하였다.

그러한 때에 기독교청년회의 출현은 어둡고 침침하던 그 시대에 있어서 유일한 등불이었으며 이상재·윤치호씨 등 당대 일류의 지도자들이 장래의 회망을 오직 청소년들에게 걸고 운동에 가담함으로써 청년회의 비중은 더욱 무거워 졌었다.

그에 따라 당시 황실에서도 청년회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강희 원년 11월 11일 신회관 상량식에는 특히 나이 어린 영친왕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이날은 마침 해외밀사사건의 여파로 고종황제가 일본의 강압으로 퇴위하고 순종황제가 대신 등극하는 날이었으므로 그에 항거하는 뜻으로 시내는 모두 철시하고 인심이 자못 흉흉하였으므로 상량식은 부득이연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달 14일에 거행된 상량식에는 고종황제께서 거액의 내탕금을 하사하시고 특히 새로 책봉된 황태자 영친왕을 파견하였는데 영친왕은 건물 초석에 「1천 9백 7년」의 문자를 쓰고 대강당 벽 위에 한줌의 진흙을 첨가하셔 이 공사의 주인공 노릇을 하였는 바 이는 극히 완고하고 보수적인 그 시대의 왕실로서는 처음있는 일로 청년회로서는 크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종로에 붉은 벽돌 3층의 청년회건물(6·25 동란때 소실)이 완성된 뒤인 1909년 (강희 3년) 3월에는 고종황제가 또 10만원을 하사하셨으니 한국 기독교청년회와 구 황실과는 실로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하겠으므로 비록 병환 중에 계시기는 하나 영친왕 내외분의 금혼식을 특히 YMCA에서 거행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영친왕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4일전의 일이다. <계속>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