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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때 관객 폭동 부른 불협화음의 극치

스위스 로잔의 발레단 ‘베자르 발레 로잔’의 ‘봄의 제전’ 공연. [사진 Francette Levieux]
어제 낮,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 도중. 20분만 쉬고 가자는 마에스트로 덕분에 혼자 조용히 연습 좀 하겠거니 했더니, 목관악기 수석들이 하나같이 무대 위에 남아 있다. 1년 365일 중 족히 200일은 무대에 서는 마린스키 멤버들이 쉬는 시간마저 연습이라니….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우리가 오늘 밤 연주할 협주곡들이 아니다. 모두 내일 연주할 ‘이 곡’을 연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럼 그렇지. 요샌 어딜 가나 온통 ‘이 곡’이다. 나도 불과 한 달 전 대관령에서 연주했다. 그러고는 몇 주 동안 알 수 없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내내 머릿속에서 이 곡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이 곡을 나와 함께 연주한 김다솔 군도 비슷한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완전히 우리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것 같지 않아?” 2013년 현재 여기저기서 여러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이 곡’, 초연 100주년을 맞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이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말러 서거 100주년 등을 기념하며 한 해 동안 해당 작곡가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연주하는 것이 클래식 음악계의 추세로 자리 잡긴 했지만, 이 곡처럼 초연 100주년을 기념하는 곡이 또 있던가? 아무리 ‘운명 교향곡’이, ‘비창 교향곡’이 유명하다 한들, 기록 속에만 존재하는 어느 하루에 불과한 그들의 초연과 이 곡의 초연은 급이 달랐다. 새 시대로의 입성. 물론 그날 그 자리의 관객들은 잘 몰랐다.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가 묘사한 그날 그 자리,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음악이 시작되고, 음산한 시작 부분이 지나자 비로소 막이 열린다, 무대 위에 선 무용수들. 춤이 시작되고, 기괴한 춤사위에 어수선해지는 관객석. 점점 강도가 짙어지는 불협화음들에, 음악이 계속될수록 몸부림에 가까워지는 춤. 관객들은 야유를 쏟아내고 몇몇 우아한 신사숙녀들은 공연장을 나가버린다. 어느새 관객석의 소음이 음악을 모두 덮을 정도로 커지자 무대감독이 기지를 발휘해 관객석의 조명을 모두 켜버린다. 잠시 동요하나 싶던 관객들, 물론 불을 끄자마자 다시 폭도로 변했다. 급기야는 경찰까지 출동! 이 사태를 조금 더 상세히 그린 BBC의 특집 단막극 ‘제전의 폭동(Riot at the Rite)’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아마도 공연 직전 무용수들을 독려하는 프로듀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말일 것이다. “자네들은 지금 막 역사를 창조하려고 하고 있어. 그런데 기억해. 무슨 일이 일어나든, (멈추지 말고) 계속해.”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전 작품을 녹음했다.
과연 무엇이 100년 전의 그들을 그렇게 자극했을까. 물론 플롯부터다. 봄의 신을 달래기 위해 선택받은 한 순결한 처녀가 죽을 때까지 춤을 추며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 이 내재된 원시성이 건드린 것이 단순히 ‘우아미’를 으뜸으로 치는 파리지앵의 심기일까? 20세기로 건너오며 창창해진 시민 의식 저 너머의 리비도를 깨운 이 발레의 야만성에 겉으로 혼비백산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였으리라. 산 처녀를 자연에 제물로 바치는 비문명성에 혀를 차던 그들이 불과 3년 후 마주한 것이 다름 아닌 제1차 세계대전. 잔혹한 자연 앞에 부질없는 개인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의 것이 되어 돌아왔다. 시대가 만든 예술이 시대를 앞질러버렸다.

하지만 진정한 자극은 이 플롯 위에 완벽히 군림하는 음악이다. 4주 전, 우리가 첫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날, 같이 식사를 하던 첼리스트 지안왕이 이 곡 얘기를 꺼냈다. “얼마나 어려우면 카라얀은 마지막 ‘희생의 춤’ 부분을 몽땅 16분의 3박자로 통일해서 다시 그려 오라고 시켰다니까.” 바로 다음 날, 그 누구보다 카라얀의 심경을 정확히 이해했다. 리허설을 백 번도 넘게 해야 해서 초연이 1년이나 늦어졌다는 일화도 비로소 가슴으로 와닿았다. 문제의 ‘희생의 춤’ 첫 페이지는 각각 한마디씩 3/16-5/16-3/16-4/16 으로 시작해 다시 5-3-4, 또 3-3-5-4, 3-4-5-5-4로 진행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패턴도 없다. 어떤 장단도 허용치 않는 ‘완전한 리듬에의 속박’이다. 조금 익숙해져서 박자를 세는 대신 리듬을 타려고 하면, 틀린다. 20년 이상 내 몸에 밴 모든 리듬이 하나라도 나올라치면, 바로 틀린다. 이거야말로 완전한 속박에 의해 비로소 맞이하는 완전한 해방이 아닌가.

어제 오케스트라 단원들 여럿이 뒤섞여 각자 자기 파트만 연습하는 걸 듣던 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소음들이 실상 목관악기가 총출동하는 첫 네 페이지와 너무 흡사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연의 혼돈. 이 잠재적 폭력성은 두 번째 곡 ‘봄의 예언자, 처녀들의 춤’에서 바로 물리화된다. 놀라운 것은 ‘쿵쿵쿵쿵’ 하는 네 박자 리듬으로 수십 번 반복되는 이 불협화음이 각각 A플랫장조의 딸림7화음과 F플랫장조(사실상은 존재하지 않는)의 으뜸화음이라는, 너무나도 멀쩡한 두 화음의 결합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러시아적 사르카즘(풍자)이 또 있을까. 이후 이 곡 전체에서 발견되는 거의 모든 불협화음이 이처럼 둘 이상의 협화음의 결합체다. 논리에서 착안한 비논리가 다시금 논리가 된 것이다. 시대의 궤변, 그 폭력성이라니.

혹자들은 이 곡이 이제는 현대음악 축에도 못 낄 고전이라 평하지만 글쎄. 신세기의 문턱에서 태고로 회귀하는 이 곡에 어차피 ‘절대시간’은 무의미할 테니. 나에게 제일 큰 자극은, 이 곡이 올해로 백년‘이나’ 되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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