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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들 "못 참겠다" … 해외공관선 무슨 일이

30대 요리사 A씨. 그는 ‘대사관 셰프’다. 2008년부터 해외 공관을 돌며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기자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음식 외교로 한국을 알리는 꿈을 꿨지만, 현실에서 돌아온 건 무시와 하대뿐이었다”고 요리사 초년병 시절을 기억했다. 몇 년에 걸쳐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딴 A씨는 대사관 셰프가 되기 위해 산업인력관리공단과 한식세계화재단이 실시하는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고 한다. 1년간의 전통음식전문가 과정과 3개월간의 해외 공관 조리사과정을 거친 A씨는 드디어 원하던 대사관저 요리사가 됐다. 하지만 부임 직후부터 주방 관리와 장 보는 목록 등을 놓고 대사 부인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A씨는 “대사 부부의 세 끼 식사를 챙기는 것도 고역이었다. 가벼운 식사를 만들면 성의 없다며 혼이 났고 요리 실력을 발휘하면 예산 낭비라고 다그쳤다”며 “불만을 표시하면 오히려 ‘해고하겠다’는 협박이 되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개월 만에 6㎏이 빠졌다. 객지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었고 선배들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만 할 뿐이었다”고 했다.



"음식 외교 꿈꿨는데 식모 취급" … 젊은 셰프들 서슴없이 불만 제기
만찬, 공관 살림 맡은 대사 부인들 적은 예산으로 운영하다 보니 갈등 생겨
“한밤중에 깨워 야참 준비 요구 … 청소, 쇼핑, 사적 심부름까지 시켜"

"초과근무, 과도한 하대” 지적 많아



 최근 일부 재외공관 요리사들이 인격모독과 비인간적 대우를 당했다며 항의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진위 공방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엔 남태평양 지역 공관의 대사 부부가 폭언과 인격모독, 폭행과 감금을 했다는 주장이 인터넷에 올라왔고, 유럽·아프리카 지역의 요리사는 감금, 출입 금지, 홍두깨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외교부도 논란이 된 일부 공관에 직원을 파견해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외교부 재외공관담당관실 관계자는 30일 “해외 공관 전체에 대한 실태조사 후 요리사들의 급여와 역할 등에 맞게 처우를 개선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재외공관 요리사들의 주장은 사실인가. 그리고 왜 이런 의혹이 제기되는 걸까. 본지는 전·현직 재외공관 요리사 20명과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대사관 셰프’의 실태와 문제점을 취재했다. 그 결과 20명의 요리사 중 11명은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했고, 9명은 자신이 부당한 행위를 당했거나 주변에서 유사한 일을 겪었다고 답했다. 이들이 주장한 부당행위는 ▶초과·휴일 근무 강요 ▶사적 심부름 ▶과도한 하대 ▶일반 공관 행정원과의 차별대우 ▶사생활 침해 ▶공금유용 의혹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 주장처럼 감금이나 폭행을 당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4월 해외 전지훈련 중인 핸드볼 국가대표팀을 위해 유럽지역 한 공관에서 만찬을 준비한 모습. 10명 이상 대규모 방문 시 관저 요리사는 뷔페식 식사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관저 요리사들 중에선 특히 젊은 요리사들의 불만이 컸다. 이들은 “꿈꿔왔던 대사관 셰프와 현실의 공관 요리사 간의 간극이 너무 크다”고 입을 모았다. 동남아 공관에 근무하는 요리사 B씨는 “시대가 변했는데도 관저 요리사를 아침, 점심, 저녁을 차려주는 식모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요리 재료 구매나 주방에 대한 지나친 참견도 참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들은 주로 공관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는 대사 부인과 갈등을 빚고 있다. 각종 만찬이나 공관 안살림을 맡는 대사 부인은 요리사와 소통해야 할 일이 많다. 그렇다 보니 관저 요리사 채용 면접부터 해고까지 대사 부인의 판단이 절대적이다.



 대사 부인들이 고용과 해고 권한을 갖고 있다 보니 관저 요리사들은 심부름이나 잡무까지 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요리사를 가정부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3개 공관에 근무했다는 B씨는 “대사 부인들은 우수한 요리사의 추천리스트를 만드는 한편 ‘블랙 리스트’도 만들어 공유한다”며 “공관장 임기 후 다른 공관에 재취업을 해야 하는 관저 요리사의 특성상 대사 부인에게 찍히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털어났다.



 대사 부인들과 요리사들 간의 오랜 물밑 신경전이 20·30대의 젊은 요리사들이 많아지면서 수면 위로 노출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남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한 공관에서 지난해 7월 지역 정·재계 인사 등 20여 명을 초대해 만찬을 하는 모습. 이날 한국대사관은 전통예술·생활양식 등을 설명하고 김치·불고기· 잡채 등을 대접했다.
젊은 셰프들은 공과 사를 구별하고 사생활 보장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데 반해 대사 부인들이 그간의 오랜 관행을 요구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젊은 요리사들은 “하인이 되려고 셰프가 된 게 아니다”(B씨)거나 “청소뿐 아니라 마트·백화점 쇼핑까지 데려가 하인처럼 부리고, 한밤중에 깨워 야참을 준비해 달라고 할 때는 욕설이 저절로 나왔다”(전직 요리사 C씨)며 반발한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이수영 교수는 “과거 관저 요리사들은 의식 깊은 곳에 관존민비(官尊民卑)가 자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 세대는 서로를 단순한 계약관계로 인식한다”며 “자존감이 강한 젊은 셰프와 대사관의 퍼스트레이디 사이의 충돌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교부의 고위 관계자는 “까칠한 부인과 관저 요리사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공관장도 많다”고 귀띔했다.



수면 아래의 불만이 폭로로 이어진 배경에는 대사관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재외공관은 한국 정부의 감시가 소홀하고 주재국에선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있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인권침해나 예산전용 등의 문제가 발생해도 감시가 쉽지 않다. 감사원에 따르면 한 해에 재외공관 감사가 이뤄지는 곳은 20개 미만이다. 공관 설치 후 감사를 받지 않은 지역도 40곳(2012년 3월 기준)이나 됐다. 이번에 요리사 문제가 발생한 대사관도 최근 10년간 감사원 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



 재외공관의 예산 부족도 갈등을 부추긴다. 올해 재외공관의 예산 운영경비는 2338억원. 9년 전인 2004년엔 1850억원이었다. 그 사이 공관이 33개나 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관당 예산은 거의 제자리다. 물가 인상률이나 환차손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대사관에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대사관이 예산 확보를 위해 공공연히 암시장에서 환치기(불법 외환거래) 등을 저지르는 일도 발생한다. 외교부 재외공관담당관실 관계자는 “전체 공관의 절반 이상이 대사관 운영경비 등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관 행정원 인건비도 2004년 527억원에서 올해 783억원까지 올랐지만 부족하다는 평가다. 외교부 관계자는 “공관 행정원 급여는 월 평균 1460달러가량으로 주요 선진국에 비해 50~60% 수준”이라고 말했다. 요리사의 경우 월 2500달러 내외를 받지만 물가가 비싼 현지 급여로는 충분치 않다. 공관장들은 실력 있는 고급 한식 요리사 채용을 원하지만 현실은 요리사들의 초과근무 수당도 지급하지 못하는 처지다. 기준이 높은 공관장과 박봉에 지친 셰프들 간에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유럽지역 공관에서 일하는 요리사 D씨는 “계약 당시부터 예산 부족으로 주당 52시간 기본근무수당 외에 초과근무수당 지급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실력 있는 요리사는 급여와 근로조건 등의 이유로 재외공관에 지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표준계약서보다 ‘공관 내규’ 우선 적용



2010년 주탄자니아 대사관서 낸 요리사 채용공고. 여성 지원이 가능하다고 돼 있다.
공관 내규에 따른 계약도 문제다. 정부는 외무공무원법에 따라 ‘재외공관 업무보조원 규정’을 두고 관저 요리사 등 행정원의 지위와 근무조건을 명시하고 있다. 훈령에 따르면 공관장은 고용계약을 통해 근무시간, 휴일, 수당, 퇴직금 등을 정해야 한다.



문제는 계약이 ‘공관 내규’로 제약 받는다는 점. 공관 지역 특수성을 고려해 탄력적 운영을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내규가 악용될 소지가 있다. 유럽지역에 근무했던 한 재외공관 요리사 E씨는 “수습기간(3개월) 동안 해직 관련 내규를 악용해 공관장이 임기 중 5~6차례나 요리사를 교체하는 경우도 봤다”고 전했다. 수습기간 중에는 통고 없이 즉시 해고가 가능하고, 비행기 값도 요리사가 물도록 내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에선 내규를 근거로 요리사의 추가근무를 강제하고 휴무일을 박탈하는 경우도 있다. 전직 재외공관 요리사 D씨는 “저녁행사의 경우 새벽 1~2시까지 이어지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똑같이 조찬을 준비해야 한다”며 “6개월간 이틀밖에 못 쉰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재외공관 담당관실 관계자는 “노동법에 근거한 표준계약서를 2011년에 새로 만들어 권고 중이지만 국가별 특수성 때문에 운영내규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관 행정원이 자주 바뀌면서 공관 내 정보유출 우려와 함께 관련 소송도 빈번하다. 외교부에 따르면 재외공관 행정원이 주재국 노동법 위반 혐의로 재외공관을 현지 법원에 제소해 진행 중인 사건만 10여 건이다. 연세대 행정학과 조윤직 교수는 “내규에 따른 계약은 탄력적인 운영으로 재외공관의 효율을 높일 수 있지만, 피고용자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도 있다”며 “재외공관 행정원 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진다면 원칙 있는 법 규정을 통해 권리 보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공식 행사 때만 활용을”



외국의 경우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본의 경우 재외공관 요리사들에게 공관 밖에 집을 얻어 주는 방법을 통해 공사를 구별하고 갈등을 방지한다. 영국에선 대사관 셰프 공개채용을 원칙으로 하는 한편 관련 법을 통해 재외공관 행정원의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유럽권 국가의 경우도 법적으로 근무조건을 명시해 부당한 초과근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사관 셰프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예산 확충과 관련법 보완, 요리사에 대한 의식 변화 등을 주문했다. 그 밖에 소수 공관의 셰프를 줄이고 오·만찬 등 공식 행사 때만 전문요리사를 쓰는 방안이나 현지 한식당 등과 연계하는 방안 등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서울대 이수영 교수는 “젊은 셰프들은 나라에 고용됐다고 생각하지, 대사 부인에게 고용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제도적 개선에 앞서 서로 간의 인식 차이 극복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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