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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더위조차 더위 먹었던 지난 더위

신아연
재 호주 칼럼니스트
24, 33/ 25, 33/ 23, 34 / 24, 35/ 26, 33….



 오해 마시길. 나열된 숫자는 미인대회 후보자들의 허리와 엉덩이, 혹은 가슴 사이즈가 아니니. 이 숫자는 지난 8월 한 달간, 전국적으로 요지부동이던 올여름 최저, 최고 기온 표시다. 물론 지역에 따라 38, 39도까지 올라간 곳도 있었지만. 이쯤 되면 올여름엔 더위조차 더위를 먹었다고 해야 할지.



 ‘설마 오늘은, 혹여 내일은, 그래도 모레는, 그렇다면 글피는, 아무려면 주말에는…’을 되뇌며 폭염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기를 오매불망했건만 8월 내내 숫제 고정된 ‘미인 사이즈’는 괴로움 정도가 아니라 적개심과 절망감, 공포심과 좌절감마저 느끼게 했다.



 지난 1일 이래 한국에 와 있다. 대략 2, 3년마다 오는 편이지만 이민 생활 21년 만에 여름 한국을 방문하기는 처음으로, 인천공항에 발을 디디는 순간 ‘모국은 내전 중’이란 혹독함이 확 끼쳐왔다. 그랬다. 그건 분명 전쟁이었다, 더위와의 처절한 전쟁. 실제로 올여름 혹서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전쟁 중에 희생된 것과 다를 바 없을 테니.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 호주의 겨울에서 갑자기 북반구의 여름으로 체감 상황이 백팔십도 바뀐 데다, 더위는 적응되는 게 아니라는 지인의 말을 기억한 순간부터 지레 포기하고 다만 하루하루를 견디며 지금에 이르렀다.



 설상가상 전력난으로 냉방조차 한껏 할 수 없으니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구분 없이 그악스러운 더위에 시달리며 폭염은 어느 새 ‘공공의 적’이 되어 갔다.



  입을 열면 더위 인사고, 굳이 입을 안 열어도 ‘지 알고 내 아는’ 공통의 고통이 있기에 넓고 빠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말이다.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 갈등이나 내홍(內訌)조차도 더위 앞에는 녹아 내린 듯 오직 무더위에 살아남는 것만이 국민적 해결과제이자 공동 관심사가 되어 같은 불볕을 정수리에 이고 있다는 것만으로 모종의 유대감 내지 일체감을 자아내는 것 같았다고 할까.



 낮 시간보다 더한 밤의 지열, 시척지근한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음식물 쓰레기, 숨조차 턱턱 막히는 출퇴근 시간대의 지하철 환승역, 휴식 없이 뒤채는 불면의 열대야 등을 마치 전장의 사선 넘듯 함께 넘어야 했기에.



 한데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건물 안이라 해도 병원이든, 은행이든, 관공서든 그다지 시원한 곳이 없었으니, 여북하면 시내버스를 타고 일없이 한 바퀴 돌면서 피서를 삼았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을까. 버스 안이 제일 시원한 곳이라 그리 했다는 것인데, 시내버스의 환승 제도 덕에 나 역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는 아무 버스에나 일단 몸을 실은 후 얼추 땀이 식으면 가던 길을 마저 가곤 했다.



 모국에서의 21년 만의 한여름을 땀에 젖다 못해 불린 채 ‘삶은 시래기’ 꼴로 그렇게 오롯이 통과한 것이다.



 27, 20/ 28, 20/ 28, 18/ 27, 17….



  이건 또 무슨 숫자인가. 미인의 ‘빵빵하던’ 몸매가 갑자기 빈약해진 걸까. 그게 아니다. 엊그제 확인한 8월 말과 9월 초의 예상기온이다. 낮 최고 기온에서 ‘30’이란 숫자가 사라졌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갑다. 게다가 이제 아침 최저 기온은 20도 안팎으로 떨어진다지 않나.



 드디어 더위가 퇴각을 하려는 모양이다. 지인은 여름이 되돌아올까 무서워 가만 숨죽이고 차라리 모른 척해야겠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전쟁은 끝난 것 같다. 적어도 내년 여름까지는 휴전이다.



  어젯밤에는 올여름 들어 처음으로 모기를 봤다. 너무 더우면 모기도 없다더니 그 말대로라면 확실히 날씨가 누그러진 것이다. 그러니 모기조차 반가울밖에. 창을 스치는 바람이 확연히 서늘해졌다. 더위 저도 할 만큼 했으니 제풀에 지치게도 생겼지 않나. 물러나려고 들면 성큼성큼 물러날 것이다. 우리 모두 참 고생 많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모처럼 보송한 얼굴을 하고 익숙한 시구를 떠올려 본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신아연 재 호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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