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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청소년 유해물이라고? 독자 모욕 아닐까요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스페인 만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시대와 불화한 한 인생의 기록이다. 1910년 스페인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는 아나키즘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탄압과 동지들의 배신, 그리고 ‘먹고살기’라는 삶의 무게 앞에 이상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 작품은 실화다. 작가이자 바스크대학 불문과 교수인 아들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실패와 패배, 그리고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모욕”으로 점철된 아버지의 삶을 위로하고자 글을 썼다. 2009년 출간돼 스페인만화대상을 비롯해 10여 개의 상을 휩쓸었고, 프랑스·독일 등 유럽 전역에서 번역돼 찬사를 받았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표지. [길찾기]
 이번 달 초 한국 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륜)는 한국에서 7월 출간된 이 만화에 ‘청소년 유해매체’ 판정을 내렸다. 만화 속 일부 성행위와 성추행 장면이 이유였다. 출판사는 이에 반발하며 “작품의 전체 맥락을 봐 달라”고 재심의를 요청했다. 청소년보호법에 의거해 유해매체 판정을 받은 작품은 ‘19세 미만 구독 불가’ 스티커를 붙이고 격리된 장소에 진열된다. 마케팅·광고가 사실상 금지돼, 성인 독자들이 작품을 접할 기회 역시 대폭 줄어든다.



 만화 속 장면의 수위에 대한 판단은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개인적으로 고등학생 이상이 보기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자의적인 판단 기준도 문제지만 더 큰 충격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이 작품을 ‘청소년 유해물’로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출판사는 물론이고, 작품에 감동을 받은 독자들에게까지 이는 일종의 모욕처럼 느껴진다. 배경에는 불합리한 만화 심의 제도가 있다. 현재 한국에서 출간되는 만화에는 등급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간륜의 사후 심의를 거쳐 청소년이 보기에 적절치 않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무조건 ‘청소년 유해물’이 된다. 청소년에게 결코 ‘유해’하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 높은 성인용 만화가 설 자리가 한국엔 없는 것이다. 90년대부터 만화계가 꾸준히 이 문제를 제기하며 ‘영화·게임과 같은 등급제 적용’ 등을 대안으로 내놓았지만, 제자리걸음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전쟁, 난민수용소, 독재의 참상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한국의 간륜은 ‘음란성’밖에 보지 못한 것 같아 슬프다”고 했다. 문득 여성가족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만화로 출간한다는 소식을 떠올린다. 일본군에 의한 성 착취 묘사 없이 위안부들이 받은 상처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장면들 역시 음란하다며 ‘청소년 유해’ 딱지를 붙일 텐가.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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