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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어느 시절인데 지역감정 발언이라니

고정애
논설위원
“러시아에 유대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터키에 있었다면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겨냥했겠지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프라하의 묘지』를 읽다 눈에 들어온 대목이다. 러시아 정보원이 문서위조범에게 반유대주의 문건을 만들어달라며 한 말이다. 유대인의 집단이주(디아스포라)로 러시아인들 사이에 생긴 반감(반유대주의)을 증폭하겠다는 뜻이었다.



 20년 전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송 교수 역시 지역감정이 지역이동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었다. 국내판 디아스포라였다. 대충 요약하면 이랬다.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없을 정도로 격렬한 지역이동이 있었다. 60년부터 25년간 호남에서 377만 명이 타지로 옮겨갔다. 충청은 192만, 영남 92만 명이 움직였다. 사람들 간 상호작용 속도가 급격히 늘었는데 의식 개방 속도는 이에 못 따라갔다. 지역이동이 심했던 호남 출신에 대한 호감도는 떨어졌다. 영남은 반대였는데 부산·대구 등 영남 산업지대 덕분에 지역이동을 덜해서였다.”(『한국사회의 갈등구조』)



 그 무렵 지역감정은 ‘망국병’으로 불렸다. 5·18민주화운동도 생생한 터였다. 국회(13대)엔 전무후무하게 지역감정해소특별위가 꾸려졌다. 상상키 어렵겠지만 여야 합의로 보고서도 채택했다. 인사(人事)와 자원 배분에서 지역균형이 필요하다는 요구였다.



 그땐 그랬다. 결과적으로 그런 시기를 거쳤기에 지역감정이 완화됐다고 믿었다. 이젠 계층·세대 갈등이 더 문제라고 여겼다. 지난해 누군가 “‘우리가 남이가?’는 어느덧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얘기가 돼버렸다”고 썼을 때 공감했다. 반유대주의가 20세기 전후의 잔재이듯, 지역감정도 옛일이 되어간다고 확신했다.



 지금은, 모르겠다.



 5·18 비하 발언이 방송을 탔을 땐 실수겠거니 했다. 영·호남을 각각 비하한 ‘과메기’ ‘홍어’가 인터넷을 도배했을 땐 철없는 소수의 치기(稚氣)겠거니 했다. 국회에서 “경찰의 핵심 수사라인 전원이 영남 출신”이란 주장이 나왔을 때도 사정라인이 특정 지역 일변도인 건 역대 정권의 고질이었으니라고 넘겼다.



 그러다 “광주의 경찰인가”란 발언을 마주했다. 분명 잘못된 말이었다. 더 경악한 건 한동안 보인 새누리당의 ‘당당함’이었다. 오히려 “민주당은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안 했느냐”고 따졌다. 사실 그런 유의 발언은 “선거 때면 드러나는 지역감정”(한화갑 전 의원) 에서 드러나듯, 선거 때 돌출하곤 했다. 이판사판 염치 안 가릴 때 말이다. 지금은 평시다. 게다가 공식 회의 석상이었다. 질적으로 악성이었다.



 그러고 보면 정권의 분위기도 걱정스럽다.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인물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는가 하면 대선 전에 내걸었던 동서화합 등 ‘국민대통합’은 슬그머니 사라진 지 오래다.



 정치지형은 또 어떤가. 90년 정치지도자들의 담합(3당 합당)으로 호남이 고립된 적이 있다. 그래도 호남은 정치의 상수(常數)였고 두 명의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선 유권자의 선택으로 고립됐다. 호남의 정치 엘리트 탓이 크지만 여하튼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제 “호남은 정치의 변수(變數)”(박성민 정치컨설턴트)일 뿐이다. 호남 자력으로 의미 있는 주자를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의미다. 급기야 5월 말 호남의 인구가 충청에도 뒤지게 됐다. 조선 시대 이후 처음이란다.



 과거엔 지역감정 해소가 정치적으로 옳은 일일 뿐만 아니라 실리도 있었다. 머릿수 싸움이란 정치 속성 때문이다. 특정 지역을 대놓고 외면할 수 없었다. 눈치를 봐야 했다. 지금도 그러한가. 혹여 최근 돌출하는 지역감정 발언들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호남의 ‘약화’와 맞물린 게 아닌가, 그렇다면 해소하기 더 어려워진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호남 출신 지인이 최근 “완화되던 지역감정이 대선을 계기로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했다. 과장(誇張)이라고 넘겨버리기엔 뭔가 찜찜했다.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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