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퇴락한 벽화 한켠에 윤곽만 남은 고구려 사신 두 명

아프라시압 박물관의 벽화. 발견된 지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고구려 사신들의 모습(오른쪽 깃털관을 쓰고 칼을 찬 두 사람)은 윤곽만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사진작가 정철훈
‘옛날 페르시아에 사산이라는 이름의 왕조가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1000개의 밤하고도 하룻밤 더 계속되는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가 있어서 내게 사마르칸트는 특별한 도시다. 이 왕조의 술탄인 형 샤리아는 지난날의 군주로서는 드물게(이 지역은 칭기즈칸의 아들들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곳이다) 우애의 정이 넘쳐 동생인 샤즈난에게 타타르왕국을 하사했다. 그리하여 샤즈난이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사마르칸트다. 좀더 얘기하자면, 동생이 그리워진 형이 그를 초대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두 형제는 모두 아내의 부정을 발견하게 된다. 분노한 술탄이 더 이상 여자를 믿지 못해 매일 밤 한 명의 여자와 결혼해 잠들되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죽여버려 온 나라에 딸을 잃은 자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게 됐는데, 이때 스스로 술탄에게 시집가겠다고 나선 용감한 아가씨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이 바로 셰메라자드….

셰메라자드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 결국 동 트고 난 뒤에도 술탄이 그녀를 죽일 수 없었듯이 사마르칸트와 인근 부하라에 대해서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와 노래들이 있었다. 일찍이 매슈 아널드는 사마르칸트를 ‘여름이면 태양이 파미르 고원의 눈을 녹여/홍수가 지는 그곳’이라고 노래했다. 오스카 와일드 역시 이 이국적인 도시에 대한 작품을 남겼다. ‘사마르칸트의 아몬드밭,/ 붉은 백합이 흩날리는 부하라,/ 그리고 옥수스 강(현재 아무다리아 강)의 누런 모래를 따라/흰 터번을 의젓하게 두른 상인들이 나아간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이스파한까지,/태양의 황금빛 정원으로부터/먼지투성이 카라반 행렬이/개잎갈나무와 단사(丹砂)를 가져온다.’

14세기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 중심지
이 풍요와 환락, 때로 타락의 이미지는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의 오리엔트에 대해 유럽인들이 지녔던 환상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환상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 이 도시의 지배자는 수없이 바뀌었다. 사마르칸트는 강력한 군주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하지만 누구도 영원히 갖지는 못한, 아름답고도 도도한 여인을 닮았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사마르칸트가 영영 기억하는 남자는 있다. 그의 이름은 ‘절름발이 티무르’, 즉 사마르칸트가 낳은 위대한 지배자 아미르 티무르다. 14세기 티무르의 제국은 동서로는 흑해에서 델리까지, 남북으로는 타슈켄트에서 페르시아만까지 광대하게 펼쳐졌는데, 그 중심지가 바로 사마르칸트였다.

칭기즈칸 가문의 사위인 티무르는 처가 못지않게 점령지를 잔인하게 파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덕분에 절름발이 티무르(Timur Leng)라는 별명이 유럽까지 태멀레인(Tamerlane)으로 와전되면서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 ‘탬벌레인 대왕(Tamburlaine the Great)’, 헨델의 오페라 ‘타메를라노(Tamerlano)’ 등의 작품을 낳았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위대한 작품을 남긴 건 티무르 자신이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두개골 탑을 쌓았던 그가 사마르칸트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원들을 지어 이 도시를 ‘동방의 로마’로 역사에 길이 남겼다. 가장 잔인한 파괴자만이 가장 위대한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이 아이러니.

그중 하나가 바로 비비하눔 사원이다. 인도 원정을 다녀온 뒤인 1399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대건축에는 여러 나라에서 끌고 온 건축가, 예술가, 공예가 등이 참여했다. 인도 원정에서 데려온 코끼리들도 한몫 거들어 기중기가 담당했을 무거운 돌들을 날랐다. 이 사원 건축에 꽤 공을 들였던 티무르는 터키와 이집트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데 격노해 책임자들을 처형한 뒤, 직접 공사를 지휘했다. 그 일은 엔리케 3세의 사신인 루이 곤살레스 데 클리비호의 기록에 남아 있다. 1403년 그의 사행록을 보면, 티무르는 서 있기조차 힘든 노쇠한 몸을 이끌고 공사를 감독하면서 ‘마치 구덩이에 있는 개들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듯’ 일꾼들에게 동전과 고기를 던졌다고 한다.

그렇게 공을 들였던 비비하눔 사원의 주마 모스크(이슬람 예배당)도 18세기에 이르면 모두 무너져 내린다. 무너진 돔은 아무리 강력한 군주도 이겨낼 수 없는 무정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사마르칸트의 상징으로 남았다. 무너지기 전에는 부피 4만㎥, 7만2700t의 벽돌이 들어갔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 그가 묻힌 곳은 이름 없는 무덤으로 남았다가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 뒤에야 영웅의 무덤으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이 마나스를 민족의 영웅으로 숭상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이렇게 민족주의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유탄을 맞은 건 간신히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고려인들이다. 그들은 소수민족의 고난을 이기지 못해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고 있다. 어쨌든 덕분에 주마 모스크 역시 1990년부터 복원 사업에 들어가 지금은 돔들과 전면 부분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다.

비비하눔 사원의 이 주마 모스크에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하는 유명한 전설이 하나 얽혀 있다. 이란에서 온 젊은 건축가가 아미르 티무르의 아름다운 아내인 비비하눔을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왕비에게 한 번만 키스하게 해주면 건물을 완공할 수 있다고 말했고, 건물의 완공을 기다리던 왕비는 결국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키스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고,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가 발견했다. 잔인한 군주는 건축가를 처형하고 왕비를 미나레트(예배당의 첨탑)에서 떨어뜨려 죽였다는 게 내가 한국에서 읽은 책의 결론이라면, 현지에서 구입한 책에는 그 젊은 건축가가 미나레트 위로 올라간 뒤 날개를 만들어 날아갔다고 나온다. 이 두 결론의 차이는 아마도 밖에서 보는 잔인한 티무르와 안에서 보는 예술 애호가인 군주 티무르 사이의 거리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역사에서는 다음과 같다. 비비하눔의 본명은 사라이 물크 하눔인데 본래는 카잔 칸의 딸로 티무르와는 정적 관계였던 후세인의 처였다. 1370년 후세인이 지배하던 발흐를 점령한 뒤 티무르는 칭기즈칸과 차가타이의 후예이자 계승자임을 천명했다. 문제는 그가 칭기즈 가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칭기즈 가문의 사위가 돼 출신상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티무르는 후세인의 처와 결혼했다. 비비하눔 덕분에 칭기즈 가문의 사위가 된 티무르가 그녀를 미나레트에서 떨어뜨려 죽였다고 하니 대단히 포악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고,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의심도 든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나는 모른다.

사마르칸트 중심부에 있는 레기스탄의 건축물들은 주름 잡힌 푸른색 돔, 사자-호랑이 그림 등 아미르 티무르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슬람의 온갖 핏빛 역사 흔적 도처에
비비하눔 사원이 아미르 티무르의 유산이라면, 사마르칸트의 중심 광장인 레기스탄에서 바라보는 세 개의 건축물은 그의 손자인 울루벡의 유산이랄 수 있다. 이렇게 말끝이 길어지는 건 비비하눔과 마찬가지로 레기스탄에 서 있는 세 개의 건축물 역시 나중에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이 광장에서 보는 풍경이 바로 사마르칸트다. 오래전, 사마르칸트를 다녀간 엘라 크리스티는 이 풍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좁은 거리를 벗어나 이 광대한 공간에 들어설 때면 첫눈에 현실이 아닌 듯한 느낌마저 들고, 예전에 보거나 상상한 적이 있는 그 어떤 것과도 전혀 다르다. 세로 홈의 돔과 가느다란 첨탑들의 섬세한 균형이, 눈부시도록 색이 아름다운 파사드(건물의 정면)가 내뿜는 경이로운 강렬함과 결합해 있다.”

이 강렬함은 그늘과 대비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환한 역사의 그늘 속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한때 중앙아시아를 호령했던 티무르도, 그가 산 채로 밀짚과 함께 성벽에 채워 넣어 죽였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죽자, 그의 제국도 역사책 속에 한때의 영역을 표시한 지도 한 장을 남기고 없어졌다. 그런 것들 중에 1965년 사마르칸트 동북쪽 10㎞ 정도 떨어진 도로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이래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아프라시압 벽화가 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가면 7세기 후반 사마르칸트의 왕 와르후만을 알현하는 12명의 외국 사절단의 모습을 담은 이 채색 벽화를 볼 수 있다.

그 벽화의 오른쪽 하단 부분, 그러니까 행렬의 마지막 부분에 얼굴과 몸 부분은 사라지고 윤곽으로만 남은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박물관에서 구입한 소책자에는 이들이 벽화가 완성된 직후, 당(唐)에 멸망한 고구려의 사신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그 근거로는 이들이 쓰고 있는 조우관과 입고 있는 복식, 차고 있는 칼과 서 있는 자세가 한국 고분 벽화에 나오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 역사학자들은 이 벽화가 와르후만 재위 시기인 7세기 후반의 초엽, 그러니까 650년에서 655년 사이에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 머나먼 사마르칸트까지 온 것일까?

이 다음부터는 햇빛의 역사가 아니라 그늘의 이야기다. 셰메라자드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7세기 들어 수와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끊임없이 침공한다.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고구려 백성들이 훗날의 고선지 일가나 고려인들처럼 나라를 잃고 유리걸식하리라는 건 뻔한 일. 어쩌면 그걸 막아보려고 사마르칸트까지 간 건 아닐까? 그럼 그 고된 사행에 성과가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로부터 10여 년 뒤 668년 마침내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사실뿐. 그 사실을 생각하면, 지워진 그림 어딘가에 고구려인들의 눈물 자국도 있을 법하다.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꾿빠이, 이상』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소설을 출간했다. 이상문학상ㆍ동인문학상ㆍ황순원문학상ㆍ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한 중견 작가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