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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매끄럽고 질긴 종이 … 종주국 중국에 역수출

경기도 가평 장지방(張紙房)에서 전통 한지를 제작하는 모습. 장지방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지장(紙匠)의 공방이다. [사진 김형진 국민대 교수]
고려시대에 생산된 종이를 당시 중국의 문인·학자들은 ‘고려지(高麗紙ㆍ고려 종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한국의 대중가요·영화·드라마를 선호하는 해외 트렌드를 ‘한류(韓流)’라 하듯이 고려지는 고려판 ‘한류’의 원조이자 또 하나의 고려 명품이다.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 송(宋)나라 왕실은 다량의 고려청자를 수입·소비했고, 그 유물들이 남송의 수도 항저우(杭州)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고려사』 등의 역사 문헌에 기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고려지가 중국에 널리 유통된 사실은 각종 문헌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1074년(문종28),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대지(大紙) 20부(副*2000폭)를 각각 바쳤다. 원나라(몽골)도 고려와 1218년 공식 관계를 맺은 지 3년 만인 1221년(고종8) 고려로부터 종이 10만 장을 공물로 받아갔다. 또 1263년(원종3) 9월과 이듬해 4월에도 원나라는 다량의 고려 종이를 공물로 수취했다. 이렇게 고려지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조선 후기 역사학자 한치윤(韓致奫;1765∼1814년)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엔 당시 중국인들의 고려지에 대한 평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중국에서 나지 않는 것은 외국의 오랑캐로부터 많이 가져다가 쓴다. 당나라 사람들의 시 속에 ‘만전’(蠻牋*오랑캐 종이)이란 글귀가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여기엔 다 까닭이 있다. 고려에서는 해마다 종이(*만전)를 조공했다. (중국에서) 책을 만들 때 이것(*고려지)을 많이 사용했다.”(『해동역사』권27 문방류(文房流) 종이편)

고려지가 중국 대륙에서 널리 유통됐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흰빛에 결이 있는 매끄러움’ ‘두터움과 흰빛’ ‘흰빛과 질김’ 등의 표현으로 고려지의 우수성을 묘사했다. 종이는 인쇄술·나침반·화약과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품인데, 한나라 채륜(蔡倫)이 2세기 무렵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지 않아 중국은 고려지를 수입해 사용한 것이다. 그만큼 고려지는 당시 중국 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송나라뿐 아니라 양자강 유역의 만족(蠻族)에게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닥나무 재료와 두드리는 도침법이 핵심
최근 몽골에서 고려지를 생산했던 공방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몽골은 품질이 좋은 고려지를 공납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려지 기술자를 징발해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여 수요를 충당했던 것이다. 고려지의 품질과 기술을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지의 기술 수준, 즉 제지기술의 특성은 무엇일까?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의) 종이는 온전히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간혹 등(藤)나무를 섞어서 만든다. 다듬이질을 하여 모두 매끈하며, 높고 낮은 등급이 몇 개 있다(紙不全用楮 間以藤造 搥搗皆滑膩 高下數等).”(권23 토산조)

서긍은 고려지의 강점을 사용 재료와 제작 방법에서 찾았다. 『고려도경』에서 등나무가 일부 사용되었다 하나, 고려지의 주재료는 닥나무(*저;楮)다. 마지(麻紙)가 종이의 주재료인 중국과 다르다. 한나라부터 당나라 이전까지 중국 종이의 80% 이상은 마지였고, 민간에 전래된 서예나 회화에 쓰인 종이도 대부분 마지였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704∼751년 제작 추정, 불국사 석가탑 출토)의 지질을 분석한 결과 재료가 닥나무임이 밝혀졌다. 당나라 시인의 시(詩) 속에서 만전(*고려지)이란 용어가 나타난 것처럼 고려지의 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때부터 닥나무를 재료로 종이를 제작해 왔던 것이다.

종이 표면을 두드려 가공함으로써 먹의 번짐을 막는 도침법(搗砧法)은 고려지 제작기술의 핵심이었다. 다라니경을 분석한 결과 통일신라의 종이도 이 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술은 종이 면을 고르게 하여 섬유 사이의 구멍을 메우고 광택 있는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종이 가공 기술이다. 또한 긴 섬유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므로 지나치게 물을 빨아들이거나 보푸라기가 이는 문제점이 해결된다. 적당한 수분을 고르게 먹인 다음, 큰 망치로 두들기는데 그때 두드리는 양을 가늠하는 데서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다. 또한 종이 지질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며 잔털이 일어나지 않아 글씨가 깨끗하게 잘 써진다. 중국에서 고려지를 ‘백추지’(白硾紙*표면이 희고 단단한 종이)나 ‘경면지’(鏡面紙*표면이 거울과 같이 맑고 깨끗한 종이) 또는 ‘견지’(繭紙*표면이 솜처럼 부드러운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런 제작기술 덕택이다. 이 기법은 종이 위에 먹을 떨어뜨리면 먹이 스며드는 속도가 느릴 뿐 아니라 먹이 옆으로 번지지도 않는다. 이 기술은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계승된 기술이다. 반면 중국의 제지술은 종이 표면에 백색 광물질 가루를 바르고, 작은 돌로 비벼 광을 내는 방식이다.

고려지의 품질을 크게 향상시킨 도침법은 닥나무와 같이 비교적 단단한 종이 재료 때문에 창안된 기술이다. 중국에서 많이 사용된 마(麻)와 비단 따위의 종이재료는 닥나무(楮)에 비해 부드럽기 때문에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고려지는 닥나무를 재료로 했을까? 닥나무는 함경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의 자연풍토에서 가장 잘 자라며,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가장 잘 이용하여 생산된 것이 고려지인 셈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확립된 도침법 기술 덕에 고려지는 종이의 종주국인 중국인도 호평을 할 만큼 경쟁력 있는 수출품이 된 것이다.

‘所’ 시스템으로 수공업 생산 국가적 지원
고려지가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기를 끈 것은 단순히 종이 제작 기술의 우수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선박과 자동차·핸드폰· TV와 같은 제품이 세계 일류제품이 된 것은 끊임없는 기술 축적과 함께 그를 뒷받침한 사회적 생산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스템은 국가적·사회적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려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바로 ‘소(所)’ 생산체제로 압축된다.

“고려 때 또한 소(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금(金)소, 은(銀)소, 동(銅)소, 철(鐵)소, 사(絲)소, 주(紬)소, 지(紙)소, 와(瓦)소, 탄(炭)소, 염(鹽)소, 먹(墨)소, 곽(藿)소, 자기(瓷器)소, 어량(魚粱)소, 강(薑)소로 구분되었으며, 해당 생산물을 공납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登神莊)조)

고려 때 제도화된 ‘소’는 금·은·동·철 등의 광산물, 소금(*鹽)·미역(*藿)·생선(*漁)·생강(*薑)·직물(*絲ㆍ紬) ·땔감(*炭)·생선(*魚梁) 등의 농수산물, 자기·칠기(*나전칠기)·종이(*紙)·기와(*瓦)·먹(*墨) 등의 수공업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곳이다. 고려는 ‘소’라는 특수 행정단위를 두고 해당 제품의 전문 기술자인 장인(匠人)과 각종 제품의 생산을 위한 잡역에 동원된 소민(所民)을 두어 수준 높은 수공업제품을 생산했다. 이를 소 생산체제라 한다. 종이와 청자 외에 나전칠기와 먹·칼 등 당시 중국에서 크게 호평을 받은 고려의 수공업제품도 이런 생산체제에서 생산되었다. 소와 함께 향(鄕)과 부곡(部曲) 및 장(莊)·처(處) 등의 특수 행정단위를 묶어 부곡제(部曲制)라 한다. 부곡제는 군현제(郡縣制)와 함께 고려의 지방행정구조를 떠받치는 두 개의 중요한 축이었다.

왕조건국 반대세력을 所에 편제시켜
부곡제의 일부인 소 생산체제는 고려왕조 성립기의 역사적 특성 속에서 생성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개간의 확대로 형성된 새로운 촌락을 군현체제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군 또는 현이 되지 못한 영세한 지역을 향이나 부곡·소 등으로 편성했다.

고려는 왕조 건국에 반대한 세력들을 이곳에 편제시켰다. 당시 지역 간에 사회·경제적 발전 격차가 커서 중앙정부가 전국을 일률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제도를 만든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그 가운데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광산물과 농수산물 및 수공업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소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편성했다. 일종의 사회적·지역적 분업체제였던 소에서 고려의 명품으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고려청자와 고려지가 생산된 것이다.

고려청자와 고려지는 사치와 화려함을 추구한 고려 문벌귀족층의 기호와도 맞물려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소는 명품을 향유한 문벌귀족층과 명품을 만드는 장인층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 고리 역할을 하였다. 문화의 향유자와 생산자의 분리는 고도의 예술성을 갖춘 질 높은 문화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 고려지 역시 이러한 사회적 생산시스템의 결과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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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