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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흑백의 안경을 벗자

뜨거운 붉은 태양, 울창한 초록빛 숲, 넘실대는 푸른 바다. 도시 사람들은 연일 찜통더위에 시달리고 있지만, 대자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야말로 색채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 현상을 접할 때마다 나는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흑백 논리의 비극이 슬프게 느껴져서다. 일단 그 폐해의 극단을 그려보자면 이렇다.

자연세계에 ‘회색’이라는 색깔이 있다. 이 색깔을 두고 사람들은 묻는다. “이것은 흑인가 백인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흑이야.”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백이야.”
하지만 자연의 실재(實在)는 외친다.
“아니야, 나는 회색이야. 회색이라고.”

비극은 사람들에게 있다. 물음부터가 흑인지 백인지를 요구한다. 그리고 여기, 아무도 그 색깔을 회색이라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데 우리 시대의 아픔이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자연의 세계는 오만 가지 색채가 각각 자기 색깔을 뽐내는 가운데 이 모두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이렇거늘 유독 우리 사회에서는 흑과 백만 존재하는 듯이 경색되어 있다. 이런 문화에선 회색만 입장이 난처한 것이 아니라 빨주노초파남보로 대표되는 색의 스펙트럼 전체가 그 풍요로움을 잃고 흑백의 냉혹하고도 초라한 체제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의 ‘4대 우상론’ 중 하나로 ‘동굴의 우상’을 논급했다. 이는 개인의 특성습관환경 등에서 비롯된 편견과 오류로 인해 인간이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은 동굴 테두리에 시야가 제한되기에 드넓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만 맹신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우물 안 개구리’의 형국이다. 이렇듯 우리는 각자의 우물 속에서 올려다 본 손바닥만 한 자기 하늘을 전부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꼴 아닐까. 하늘에서 내려다보일 자신의 콩알만 한 우물은 생각지도 않은 채 말이다.

이 우물 안 관점에 갇혀서 타인을 위한 눈과 귀는 닫아두고, 자신의 이야기만 외쳐대고 있으니 소통이 될 리 없다. 그러기에 말이 대화지 실상은 저마다 자신의 독백만 교대로 늘어놓는 꼴이다. 그 대상이 심지어 나와 아주 가까운 가족, 연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SNS를 위시한 사회의 소통 창구가 다양화될수록 서로 간 대화는 불통을 넘어 먹통이 되어가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

2000년 전 예수님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도 그것이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요지부동으로 고정한 채 그분의 혁신적인 발상에 딴죽, 딴전, 딴지를 일삼았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고약한 강퍅함을 이렇게 질타하셨을까.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2000년이 지난 오늘도 바뀐 게 없다. 한번 적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적대적인 것이다. 도통 마음을 열지 못한다.

휴가철 돌아오는 길에 저마다 깨달음 하나씩 얻었으면 좋겠다. 대자연뿐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빛나는 이 찬란한 색채들의 향연을 흑백의 안경으로만 바라보려는 우리는 얼마나 초라한가. 흑백 TV 화면에 비할 때 3D TV의 그것은 또 얼마나 현란한가.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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