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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방, 덩샤오핑·예젠잉 거세게 공격

예젠잉(왼쪽)은 덩샤오핑의 말이라면 뭐든지 경청했다. 저우언라이 사망 5개월 전인 1975년 8월, 인민대회당 만찬 당시 국방부장 예젠잉이 부총리로 복귀한 덩샤오핑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진 김명호]
총리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혁명 1세대와 4인방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추도식 날 누가 추도사를 하느냐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4인방은 군·정을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과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을 겨냥했다. “전국적으로 우경화 비판이 거세다. 덩샤오핑은 적합하지 않다.” 4인방의 일원인 왕훙원(王洪文·왕홍문)이나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가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예젠잉은 단호했다. “덩샤오핑은 당당한 당의 부주석이고 국무원 제1 부총리다.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4인방은 절충안을 내놨다. “예젠잉이 해야 한다.” 80을 눈앞에 둔 예젠잉은 “나는 자격이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덩샤오핑은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 신세였다. 추도식을 주재하지 못하면 앞날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덩샤오핑이 침통한 표정으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가자 4인방은 긴장했다. 차기 총리는 덩샤오핑의 몫이나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만 정신 하나만은 여전했다. 총리 인선을 놓고 고심했다. 쫓아냈던 덩샤오핑은 다시 중책을 맡겨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4인방은 더 고약했다. 아무리 야단을 쳐도 잘못을 고칠 줄 몰랐다. ‘모순 해결에 능한 변증법의 대가’다운 결정을 내렸다. 의외의 인물을 발탁했다.

저우언라이 사망 13일 후인 76년 1월 21일, 마오쩌둥은 “앞으로 누구를 통해 주석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지 알려달라”는 국무원 부장(장관급)들의 요청에 화답했다. “화궈펑(華國鋒·화국봉)이 국무원을 이끌어라. 화궈펑은 정치수준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내부 단속만 하고, 외부 일은 덩샤오핑이 관장해라.”

2월 2일 중공 중앙은 전 당에 ‘1호 문건’을 발송했다.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의 제의를 중앙정치국이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공안부장 겸 부총리 화궈펑을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한다.” 문건에는 다른 중요한 내용도 들어있었다. “예젠잉 동지의 병세가 위중하다. 천시롄(陳錫聯·진석련) 동지가 중앙군사위 공작을 주재한다.”

4인방은 “예젠잉을 군사위원회에서 끌어내리고, 덩샤오핑의 총리 길을 막았다”며 자축했다. 상하이 거리에 큼지막한 표어가 나붙기 시작했다. “강력히 요구한다. 장춘차오를 총리에 임명해라.” 장춘차오는 기겁했다. 빨리 떼어내라고 지시했다. “나 장춘차오는 총리 임명을 강력히 요구한다”로 둔갑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기뻐하기는 예젠잉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이 4인방에게 대권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영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화궈펑 정도는 어린애였다.

선량하고 정직하면서 국가대사에 관심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젠잉의 건강을 걱정했다. 기를 쓰고 예젠잉의 집무실에 전화를 해댔다. “원수(元帥)마저 병세가 위중하다니 나랏일이 걱정이다.” 집무실 직원들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원수는 병에 걸린 적이 없다. 평소와 다름없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중국처럼 소문이 빠른 나라도 없다. 온갖 풍문이 떠돌았다. 외국 언론들은 진위 판단이 불가능했다. 중국인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한 줄도 모른 채, 실무파·급진파 등 신조어 만들어내느라 분주했다.

예젠잉은 침묵했다. 오랜 혁명과정을 통해 ‘침묵이 지혜의 원천’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입방정 떨다 귀신도 모르게 몰락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걱정하는 옛 부하들이 “베이징은 요양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다. 남쪽으로 거처를 옮기자”고 해도 듣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처사에 불만을 표시하는 간부들에겐 화를 냈다. “마오 주석이 없었더라면 신중국 탄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 지금도 우리는 상하이 조계의 지하실을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4인방은 예젠잉과 덩샤오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중앙군사위 상임위원회 석상에서 비수를 들이댔다.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계급주의 종식론을 선양했다. 생산력에만 치중해 인민들을 사악한 길로 몰아넣으려 한다.” 예젠잉의 비준을 받아 개방한 군사박물관도 폐쇄시켰다. 예젠잉이 의지할 곳은 마오쩌둥밖에 없었다. 주석의 결정 앞에는 풍부한 투쟁경험이나 절세의 통찰력도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예젠잉은 2년간 틈만 나면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을 추천했다. “인재처럼 구하기 힘든 것도 없다. 말을 잘 안 들어서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간 벌여만 놓은 일이 한둘이 아니다. 완성할 사람은 덩샤오핑밖에 없다.”

일곱 살 아래인 덩샤오핑에게는 짜증을 냈다. “겁내지 마라.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게 마련이다.” 덩샤오핑도 만만치 않았다. “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원칙은 양보할 수 없다.” 예젠잉은 기다렸다는 듯이 싱글벙글했다. 79세와 72세 먹은 노인들의 대화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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