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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경축사와 한국 외교의 꿈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책임 있고 성의 있는 조치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자간 대화의 틀을 만들어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함께 만들어 나갈 것’을 제안했다. 한국 측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 같은 제안이지만 일본 정치인들이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하는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일본 정치인들은 국력 쇠퇴기를 맞아 과거 역사를 부정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국가적 자긍심을 되찾으려 시도해 왔다. 군대 위안부, 역사 교과서, 독도 분쟁 세 가지 문제는 한·일 갈등을 심화시키면서 다자관계 속의 한·일 협력을 제한할 가능성이 크다. 4강 외교의 한 축인 일본과의 관계가 전환기에 들어선 만큼 한국 정부는 대일 정책을 최대한 유연하게 펼치되 미래 외교의 에너지를 다자외교 쪽으로 돌리면 좋겠다.

 6·25전쟁 이후 한국 외교는 한·미 동맹을 최우선으로 하는 원칙 아래 주변국인 중국·일본·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양자 협력을 다지려는 외교를 펼쳐왔다. 분단국가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해 이런 강대국 중시 전략은 유효하고도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주변 4강’이란 한국 외교의 공간 설정은 일본·러시아의 퇴조로 변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글로벌 세력 판도가 미·중 2강 구도로 재편되는 데다 국제사회가 네트워크화하고 수평적 관계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간 국경을 넘어 상호의존성이 증대하는 세계에서 국력을 키우려면 강대국 중시의 양자외교 못지않게 이해관계가 맞는 다양한 나라와의 외교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다자외교의 무대는 강대국들이 경쟁하는 동북아를 넘어서야 한다. 국제무대에서 이미 중견국으로 존중받는 나라들과 우선적으로 연대·협력을 강화하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이들을 묶어내는 글로벌 외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

 냉전 종식 이후 국제무대에선 평화, 환경, 개발, 인권 등 이른바 ‘소프트 어젠다’가 주목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선도적인 중견국들은 때론 강대국을 견제하고 때론 강대국을 활용하면서 다자외교 무대에서 영향력을 과시해 왔다. 이들은 상당한 경제력 및 문화력과 네트워크를 겸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캐나다·호주·네덜란드·노르웨이 등은 글로벌 거버넌스에서 창조적 아이디어와 이해 조정력, 설득의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고 평가받는다. 디지털 세상이 펼쳐지는 21세기 외교환경에선 작은 나라라도 특별한 의제를 선점하고 뜻이 비슷한 여러 나라를 모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민간기업, 시민단체, 전문가 네트워크, 심지어 개인에 이르기까지 비정부 행위자들의 외교적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이들이 정부를 제치고 외교 틈새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다자외교 무대가 지역별, 소지역별, 이슈별로 기능하는 수많은 국제기구 및 포럼들로 확산됨에 따라 ‘외교의 놀이터’는 냉전시대보다 훨씬 넓어지고 다양화됐다.

 한국은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중견국가다. 그런 만큼 다자외교 무대에서 개도국과 선진국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삼성·현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상품경쟁력과, 대중문화 한류(韓流)도 외교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인 특유의 역동성과 창의성은 적절한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될 경우 시민 외교관이나 해외 자원봉사자의 약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컨대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최근 민간기관과 함께 한국으로 유학 온 외국인 학생과, 해외로 나갈 한국의 젊은이를 대상으로 공공외교의 풀뿌리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있다. 여기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젊은이가 호응해 왔다. 한국 외교의 저변을 넓히려는 민관 협력체제에 희망적인 신호를 준 셈이다. 한국이 명실공히 다자외교 무대에서 인정받는 중견국이 되려면 개선해야 할 점도 많다. 특히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지구촌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야 한다. 또 자기중심적 이해·감정을 따르기보다는 보편주의적 가치·규범의 틀에서 세상사를 관찰하고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산업화·민주화를 60년 만에 이룬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도 다자외교 무대에서 과감히 전진해 나가야 한다. 선대(先代)가 이룬 자주독립의 염원은 우리가 뻗어나가야 할 미래의 넓은 세상과 맞닿아 있다.



이숙종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위원. 『2013 대통령의 성공조건』 『일본과 동아시아』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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