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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해방과 공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1961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앞바다에 거대한 목조선이 떠올랐다. 300여 년 전 출항 직후 침몰한 세계 최대 전함 바사호였다. 과거의 위용을 간직한 바사호의 인양에 스웨덴 국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주변 강대국들의 등쌀에 긁힌 근대의 상처가 한순간 치유되었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제국들에는 영광의 길이었고, 약소국들에는 식민통치를 벗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스톡홀름 광장에서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스웨덴인 부부가 흑인 아이를 안고 가는 그 기막힌 장면, 아프리카에서 온 입양아였다. 자립과 자강을 선물한 20세기의 민족주의를 저 밑에 접어두고 박해에서 공존, 개항에서 개방으로 전환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2013년 8월 6일, 히로시마 피폭 68주년을 맞아 일본은 경항공모함 이즈모(出雲)호 진수식을 거행했다. 중국 상하이를 포격했던 전투함 이름을 딴 이 항모는 나치 발언으로 좌충우돌하는 아소 다로 부총리의 테이프 커팅으로 경적을 울렸다. 중국 북해함대는 긴장했고, 한국의 ‘대양해군’은 전력 열세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경제대국이 몰려 있는 동북아해협엔 여전히 전운이 감돈다. ‘대중화(大中華)시대’를 열려는 중국과 군국주의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일본의 팽팽한 대치선에 올라앉은 채 한국은 해방 68주년을 맞았다. 누그러질 때도 됐건만 국민감정은 악화일로이고, 센카쿠 열도와 독도엔 백병전이라도 벌어질 태세다. 뒤늦게 도진 일본의 팽창욕 뒤편엔 대륙을 누빈 욱일기에 대한 옛 향수가 서렸다. 패권 부활을 ‘역사 정상화’로 믿는 군국주의 세력이 섬 국가에 내장된 중심지향적 집단열망을 부추기고 있다.



 유교문명권의 맨 가장자리에 내쳐진 일본의 고립감은 남달랐다. 일본의 고독 달래기는 ‘전통의 창조’에서 시작했다. 아마테라스신화와 일왕(日王)을 연결하는 ‘만세일계’의 족보를 만들었고 칭황제 깃발을 걸었다. 그러곤 중심에 붙은 형제국가 조선에 9대의 군함을 급파했다. 명분은 대등외교였지만 중심국으로 치닫는 전초작업이었다. 급기야 자신을 내지(內地)로 불렀고, 조선을 반도(半島)로 격하했다. 내선(內鮮)일체, 일선동조(日鮮同祖)로 조선인을 2등 신민으로 복속시켰다. 2000년 고립을 일거에 만회하려는 역천(逆天), 도쿄 대본영(大本營)은 ‘대동아공영권’의 중심이 될 뻔했다. 인본주의와 공존의 원리를 전파했다면 말이다. 그런데 영국 같은 ‘해외원정 제국주의’보다 일본의 대륙침략 제국주의는 훨씬 더 폭력적이고 반인륜적이었다. 결국 원폭으로 주저앉았고, 열도로 퇴각했다.



 그동안 고노 담화 같은 역사 정상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1970년대 말, 일본은 한동안 자제했던 역사적 고립감을 다시 터뜨렸다. ‘일본이여 군대를 보유한 국가가 되자!’고. 원폭의 피해가 워낙 엄청났기 때문에 패전국 일본은 가해자가 아님을 공언했다. ‘대동아전쟁 종결에 대한 조서’에서 일왕은 이렇게 고어(古語) 투로 읊었다. “적은 잔학한 폭탄을 사용해 무고를 살상하고 침해가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렀다. (중략) 기어이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까지도 파각할 것이다”고. 거기에는 36년간 조선을 짓밟은 기억은 없었다. 참회가 아니라 원망이었다. 요즘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품은 환상은 여기에서 나왔다. ‘인류의 문명을 파각’하는 적을 무찌르자면 ‘나치에게라도 배울 수 있다’고. 광염소나타가 따로 없다.



 스웨덴은 한동안 덴마크의 천대와 영국의 식민통치를 경험했으며, 독일의 침공을 겨우 막아냈다. 그럼에도 유럽공동체의 일원이 됐고 국경을 열었다. 최대의 가해자 독일의 반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이 사죄하지 못하는 이유는 중심국이 못 된 좌절감과 원폭 피해의식 때문이다. 그 좌절감과 피해의식의 그늘에서 일본은 그들이 짓밟은 한국을 보지 못한다.



 박해받은 나라는 오히려 안다, 역사 정상화가 무슨 뜻인지, 상처가 왜 아물지 않는지를. 현해탄을 가로지른 민족주의의 고압전선을 걷어내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민족해방 투쟁의 잔혹사가 끝날 것임을 오히려 우리는 뼈저리게 인식한다. 해방 68년째, 한국은 이제 그걸 덮고 세계 공존의 길로 나가고자 한다. 아니 그럴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에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시시때때로 재발하는 그 호전적 민족주의가 오히려 ‘자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가공할 무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중심국은 자신의 상처를 들추는 것보다 이웃이 받은 역사적 고통을 깊이 공감하고, 새로운 공존의 길로 나가는 관용의 나라, ‘공평과 정의의 대국’이라고 말이다. 잘못된 과거를 인정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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