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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나라, 쿵쯔의 나라

몇 년 전 한국인 친구 집에서 추석을 보낸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서너 차례 사람을 바꿔가며 절을 하고, 이웃 친척집에 가더니 또 절을 했다. 친구 아버님은 ‘중국에서도 당연히 제사를 지내지?’라고 묻는다. ‘아뇨, 그런 집은 없는데요’라고 답하니 친구 아버님은 적잖이 놀란다. 중국에서 온 풍습인데 중국에 없다는 게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요즘 한국 여행을 하러 온 중국 친구들은 열이면 아홉, “한국 화폐에 있는 인물들이 누구냐”고 묻는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그리고 신사임당…. 모두 유학자들이라고 말해주면 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화폐에서는 오로지 마오쩌둥(毛澤東)의 얼굴만 봐온 그들이었기에 옛날 인물 일색인 한국 지폐에 놀랐을 것이다. ‘한국은 유가(儒家)의 나라냐?’고 되묻는 친구들도 있다.



한국 문화·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갈수록 한국이 중국보다 유교 문화를 더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유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파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한(漢)나라의 동중서(董仲舒)와 송나라의 주자(朱子) 등을 거치며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유가의 가르침은 통치의 기준이 되면서 지식인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행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가 사상은 두 번이나 단절됐다.



첫 번째는 청나라 말기 아편전쟁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시작됐다. 당시 많은 지식인은 중국의 낙후성과 쇠락을 전통 유가 사상 탓으로 돌렸다. 심지어 ‘썩고 낡았다’는 뜻의 부후(腐朽)라는 단어를 사용해 유가 사상을 비판했다. 또 한 번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다. 그 암담했던 10년 동안 공자(孔子)는 ‘독초의 뿌리’로 인식됐다. 교사들은 강단에서 쫓겨나 길거리에서 강제로 무릎을 꿇고, 제자들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했다. 자녀들은 출신이 좋지 않은 부모들과 연루되지 않으려고 부모를 고발하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런 극단주의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세뇌를 당한 중국인들에게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오상지도(五常之道)는 사라졌다.



중국의 유가 사상은 지금도 생존을 다퉈야 하는 처지다. 주류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毛)이즘,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의 ‘3개 대표’ 이론,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 등의 틈새에서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수준이다. 이런 현실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유가 문화는 커다란 문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중국과는 달리 한국에선 유가 사상이 성리학(性理學)으로, 실학(實學)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배워서 알게 됐다. 유가 사상은 서양 문화의 충격을 받으면서도 둘은 서로 경쟁하고 보완하고 공존하고 있다. 다른 종교처럼 정기적으로 종교 행사에 참여하거나 종교 성지를 순례하지는 않지만 한국인들에게 유교는 곧 생활인 듯싶다. 어른을 존경하고, 선생님을 어려워하고, 부모의 권위를 지킬 줄 아는 유교의 덕목이 그대로 살아 있다. 공자의 고향인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서 거행되는 ‘공제탄신일’ 기념행사의 경건함과 정성이 아무래도 성균관 석전제(釋奠祭)에 못 미치는 것 같다. 역사의 무게감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다.



한국은 중국보다 오히려 더 ‘현대와 전통이 융합된 나라’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대형마트 농산물 코너에 내걸린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팻말은 자신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최고의 경지가 아닐까. 전통 문화의 장점을 계승하면서 외래 문화를 조화·발전시키려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천리 1979년 중국 선양(審陽)에서 태어나 선양사범대학을 졸업했다. 숙명여대 박사과정 수료. 한국에 온 뒤 주로 비즈니스 중국어를 가르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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